주간동아 472

2005.02.08

1·4 후퇴 때 가슴 아픈 생이별 너무나 그리운 어머니의 품

삼성라이온즈 사장 김응용

  • 경산=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5-02-03 1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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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후퇴 때 가슴 아픈 생이별 너무나 그리운 어머니의 품
    10세 소년 응용에게 포연 자욱한 평양 거리는 별천지였다. 자동차도, 탱크도, 미군도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과 반쯤 타다 만 통조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꿀맛.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피난 온 평양은 평안남도의 깊은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응용에게 신세계였다.

    “인민군이 평양에까지 들이닥치기 직전이었어. 젊은 남자는 사흘만 피해 있으면 된대. 아버지 따라가면 더 신기한 것을 구경할 수 있을 거다 싶었지. 그 길로 어머니와 평생 헤어져 지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고향은 평남 평원군 숙청리다. 몇 시간을 걸어야 기차역에 이르고, 겨울이면 어른 키만큼 눈이 쌓이던 산골마을에도 전쟁의 기운이 젖어들자 그의 가족은 이모가 살고 있는 평양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듬해 1·4후퇴가 벌어지자 아버지는 막내딸을 출산한 아내를 남겨두고 일단 몸을 피하기로 했다. 호기심 가득한 응용은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다리 끊긴 대동강을 걸어서 건너고, 물집 터져 피가 철철 흐르는 발바닥을 달래며 걷고 또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전, 대구, 부산…. 고된 피란길이었으나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머니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새어머니에게는 생전 ‘어머니’라 한 번도 못 불러드려 너무 죄송”



    “이제는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아요. 그저 고향집에 이모들, 외삼촌들, 사촌동생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바글거리면서 지냈던 것만 기억나. 어머니는 그 많은 식구들을 거뜬하게 챙겨주시는 분이었지.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서 온반을 만드셨는데, 그럴 때면 나를 살짝 부엌으로 불렀어.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맛있게 뜯어먹곤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새어머니는 김 사장에게 헌신적이었다. 야구하느라 매번 더러워지고 찢어지고 단추가 떨어져나가기 일쑤인 그의 옷을 항상 정성 들여 손질해주고 아버지 몰래 용돈을 쥐어줬다. 김 사장은 이북에 계신 친어머니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새어머니 생전에 단 한번도 ‘어머니’라 불러드리지 못한 게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 어린 마음에 내 어머니는 이북에 계신 그분뿐이라고 생각했다고, 자식이란 늘 부모 떠나보낸 뒤 후회하는 법인가 보다고.

    김 사장과 아버지는 이후 남북이산가족 상봉 신청이 받아들여지기를 매번 기대했으나 번번이 소식이 없었다. “평양 사람들만 만나게 해주지 우리 같은 시골 사람에겐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라며 섭섭해했다. 야구감독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북한 출신임이 알려지자 친척을 자청하고 나서는 못된 사람들 때문에 마음만 들쑤셔놓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북에 계신 어머니와 누이들을 찾겠다는 생각은 이제 포기했어. 하지만 죽기 전에 고향 마을엔 가보고 싶어요.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우리 어머니가 어찌되셨는지를….”

    설을 얼마 앞둔 1월26일 삼성 라이온즈가 자리한 경북 경산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던 김 사장 고향 마을처럼 새하얀 눈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코끼리’ 눈에도 살짝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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