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2

2005.02.08

12년간 막노동으로 4형제 뒷바라지, 아들 유명해졌어도 과일장사 고집

축구선수 설기현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02-03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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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년간 막노동으로 4형제 뒷바라지, 아들 유명해졌어도 과일장사 고집
    잉글랜드 울버햄프턴 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축구선수 설기현(26). 그의 어머니 김영자씨(49)는 아들이 세계적 선수로 이름을 날리는 지금에도 강릉의 한 시장 귀퉁이에서 과일 장사를 하고 있다. “번듯한 가게도 아니고 노점 비슷한 곳에서 하루 종일 비바람 맞는 어머니”로 인해 설 선수는 늘 가슴 한켠이 아리다. 설 선수는 “아들이 오죽 못하면 (어머니가) 아직 저 신세냐는 소리도 들린다”며 “하지만 어머니가 원하시는 일이니 따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설 선수는 스포츠계에서 이름난 효자다. 그의 어머니 김씨는 30세 되던 해 탄광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11세, 9세, 6세, 5세, 올망졸망한 네 아들과 함께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중 둘째인 설 선수는 강릉 성덕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꼭 성공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고생이 정말 많으셨거든요. 강릉 남대천 밑 둔치에서 포장마차를 하시다, 이후 12년 동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셨어요. 새벽 4시부터 한밤중까지 쉴 틈이 없었지요.”

    “언제나 묵묵히 최선 다하라고 가르치셨죠”

    ‘2종 영세민’인 어머니는 둘째 아들의 운동 뒷바라지를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학교 담 너머로 아들의 훈련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설 선수 또한 외롭고 힘들어 몰래 우는 날이 많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였다. 힘든 합숙 생활에 지친 동료들이 단체로 팀을 이탈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배신자’로 찍힌 그는 졸업 때까지 ‘왕따’를 당해야 했다. 고교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훈련도 고됐지만 무엇보다 따돌림이 두려워 동료들과 행동을 같이했어요. 무작정 상경해 면목동의 한 의류공장에서 셔츠 뒤집는 일을 했지요. 차라리 운동이 편하다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하지만 밤이면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어요.”

    2주간의 ‘가출’이 끝난 뒤 설 선수는 친구들과 약속한 대로 어머니에게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긴말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정한 대로 하라” 이를 뿐이었다. 학교에 가보니 “관두자”던 친구들이 모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어요. 축구는 제 가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으니까요.”

    설 선수는 2000년 벨기에 안트워프 팀에 입단하자마자 어머니에게 32평 아파트를 선물했다. 형에게는 사무실과 전셋집을 얻어주었고 동생들 학비도 대고 있다. 1998년부터 태극 마크를 달았지만 어머니는 친한 이웃들에게도 아들이 ‘국가대표 선수’임을 자랑하지 않았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강릉의 김영자씨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2002 월드컵으로 아들의 ‘존재’가 알려진 다음에도 장사를 계속하는 이유를 물었다. “평생 일을 해온 몸이라 쉬면 오히려 아프다. 아이들 공부도 안 끝났다. 하다못해 용돈벌이라도 해야 않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장사가 하도 안 돼 기현이 도움이 절대적이에요. 늘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주고 싶어하는 게 우리 아들이지요.”

    김씨는 이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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