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2005.01.11

“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이연길 북한민화협 회장, 망명 공작 입 열다 “황장엽씨 당초 미국행 권유에 정색하며 거절”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1-05 12: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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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1996년쯤베이징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비밀촬영을 한 이연길 회장(왼쪽)과 황장엽 비서.

    1997년 2월12일 오전 10시5분경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망명,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황장엽(黃長燁·81) 전 조선노동당 국제비서. 대북공작사상 최대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황 전 비서의 망명 사건 이면에는 6·25전쟁 때 활약한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 세칭 ‘켈로’) 산하의 고트(Goat, 염소) 부대장이던 이연길(李淵吉·77)씨가 숨어 있다.

    이씨는 현재 북한민주화협의회 회장과 이준(李儁) 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어 ‘이 회장’으로 불린다. 이 회장은 황 비서 망명이 있기 2년 전부터 황 비서와 깊은 대화를 나눠왔고, 영화감독처럼 황 비서의 망명을 조율해왔다. 이러한 그가 한편의 첩보영화 같은 황 비서 망명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황 전 비서와 이 회장은 지금도 자주 만난다. 황 전 비서는 기자와 한 전화 통화에서 “이연길 회장이 내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거의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나는 옛날 일을 이야기할 생각은 별로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북한의 민주화다”라고만 말했다. 기자는 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공작 책임자를 여러 경로를 통해 접촉해보려 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은 황장엽 비서 망명 공작과 관련한 주간동아의 공식 질문에 정보기관의 속성 때문인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97년 2월12일 중국 베이징. 시간은 오전 9시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 추위에 어깨를 움츠린 베이징 시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양구(朝陽區) 건국문외(建國門外)에 있는 북한대사관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초로의 한 신사가 내리더니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황장엽씨의 핵심 측근이자 그의 의형제인 여광무역 총사장 김덕홍씨였다.

    황 비서의 수행원 따돌리고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직행



    김덕홍씨는 전날 주중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황 비서를 찾았다. 그리고 “재미교포 백영중씨가 보낸 사람이 저와 함께 있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에 대사관으로 갈 테니 저와 함께 그 사람을 만나신 뒤 평양에 들어가시지요”라고 했다. 황 비서 수행원들은 백씨를 황 비서에게 30만 달러를 전하기로 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김덕홍씨가 황 비서를 북한대사관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게 이 회장이 꾸며낸 얘기였다.

    주위의 공기는 더욱 긴장돼가는 것 같았다. 김씨가 황 비서를 북한대사관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면 황 비서는 북한으로 곧 들어가야 한다. 초조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9시50분쯤 황 비서와 김덕홍씨가 문창준씨(가명) 등 두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북한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정문을 나선 황 비서는 몸을 돌려 문씨 쪽을 바라보며 뭔가를 지시했다. 망명 후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그때 문창준에게는 ‘공화국에 밀가루 3만t을 주겠다고 하는 재미 목사가 21세기 호텔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다니, 먼저 가서 접대하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문창준은 아무런 의심 없이 황 비서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문창준으로서는 김덕홍씨가 황 비서를 모시고 가서 백영중씨가 보낸 사람에게서 30만 달러를 받아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황씨 망명이 성공한 후 안기부는 “황씨가 북한에 가기 전 쇼핑을 해야 한다며 두 수행원을 따돌렸다”고 설명했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길에 멈춰서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1996년경 베이징의 한 호텔 방에서 김덕홍씨(오른쪽)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연길 회장.

    그 순간 두 사람이 어디로 가자고 말할 것도 없이 택시는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를 향해 질주했다. 왜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따로 떨어져 있는 영사부로 달려갔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국제무역대하(大廈, 센터라는 뜻)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사부는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중국 공안이 경비를 맡고 있는 조양구 싼리툰(三里屯) 외교단지에 있었다.

    10시5분쯤 택시가 영사부 앞에 도착하자, 황 비서와 김씨가 내려 영사부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있었다는 듯 남상욱 총영사가 굳게 닫힌 영사부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처럼 이 택시를 따라와 멈춰선 여러 대의 차량에서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의 사내들도 내려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국 방송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 영사부로 망명했다’는 초대형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노동당 최고 지도부에 속한 인사가 망명한 것이다.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사이자 전도사인 그의 망명은 곧 북한을 이끌어온 주체사상의 망명이었다.

    재미기업가의 ‘100만 달러 약속’ 메모 결정적 활용

    그러나 황 비서의 망명이 간단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망명을 결행하기로 했으나 조총련 등이 황 비서를 삼엄하게 경호해 성공하지 못하기도 했다. 황 비서가 망명을 결행키로 한 것은 일본 방문을 위해 97년 1월28일 베이징에 나왔을 때였다. 이 회장은 이 사실을 곧 당시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공작 책임자 A씨에게 알려 일본에서의 망명 방법 등을 세워뒀다.

    일본에서의 망명 실행 무대는 도쿄 게이오(京王)플라자 호텔이었다. 97년 2월4일 이 회장은 베이징에서 서울을 거쳐 도쿄로 날아가 게이오플라자 가까이에 있는 힐튼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 게이오플라자 로비로 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호텔 주변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손님으로 위장해 깔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총련 측도 수십명의 청년을 동원해 호텔 외각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KBS 등 다수의 한국 언론도 호텔에 몰려와 있었다.

    조총련 측의 경비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북한에서 온 방문단이 일정이 있는 경우에만 게이오플라자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직감적으로 ‘황 비서의 탈출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잠시 후 황 비서가 로비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여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자, 황 비서는 가벼운 미소로 답례했다. 그러나 경호원에 둘러싸여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버렸다.

    그 직후 이 회장은 황 비서의 수행원인 문씨를 만났다. 그때까지 이 회장은 문씨와 직접 대화한 적이 없었다. 문씨는 황 비서와 달리 이날 베이징에서 도쿄에 도착했는데, 그는 베이징을 출발하기 전 김덕홍씨에게서 “도쿄에 가면 ‘폴리(Paul Lee)’라고 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황 비서를 돕기 위해 와 있을 테니 잘 대접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폴리는 김덕홍씨와 약속한 이 회장의 가명이었다. 김씨의 소개 덕분이었는지 문씨는 이 회장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김덕홍씨의 망명을 돕기 위해 김씨에게 가발을 씌워 찍어본 사진.

    이 회장은 문씨를 호텔 내 부페식당으로 데리고 가 식사를 대접한 뒤 넌지시 20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다. 당시 북한의 암달러 시장에서는 100달러를 웬만한 사람의 1년 봉급보다 많은 돈으로 환전할 수 있었으므로, 문씨 처지에서 이 돈은 상상하기 힘든 큰돈이었다. 액수를 확인한 문씨는 손을 덜덜 떨었다. 이 회장은 “걱정하지 말고 집어넣어라. 나처럼 미국에 사는 사람에게는 큰돈도 아니다”며 안심시켰다.

    감격한 문씨는 황 비서에게 인사하고 싶다는 이 회장을 데리고 47층에 있는 황 비서 방으로 갔다. 문씨와 함께 올라가니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황 비서를 만난 이 회장은 “지금 재미교포 백영중 선생께서 100만 달러를 전해드리기 위해 도쿄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이 호텔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곤란하니 힐튼호텔로 와달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황 비서는 이 말에 숨어 있는 뜻을 재빨리 간파한 듯 “암, 받아야지. 공화국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돈인데, 받아가야지”라며 큰소리로 화답했다.

    백영중씨는 평남 성천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시민권을 딴 뒤 패코(PACO)란 회사를 설립해 성공한 기업인이다. 백씨는 95년 9월 황 비서의 초대로 북한을 방문해 황 비서가 마련해준 초대소(숙소)에서 97세 노모를 상봉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씨는 95년 9월20일자로 ‘노령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보내드리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황 비서에게 남겨놓았다.

    황 비서는 96년 무렵 이 회장에게 이 편지를 건네주며 “이 돈을 받아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황 비서에게 ‘외화벌이’는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황 비서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이 회장은 편지를 받아넣으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는데, 황 비서가 도쿄에 올 때까지 전혀 백씨와 접촉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백씨의 편지를 황 비서 망명 소재로 유용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백씨는 기자와 한 국제전화 통화에서 “그 메모는 95년 9월 북한에서 노모를 만나고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써준 것이었다”면서 “그 후 그 돈을 북한에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 비서가 한국에 온 뒤 서너 번 만났을 때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어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한 것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쓴 것이었는데 그 메모가 평소 존경하는 황 비서 망명에 결정적인 구실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덧붙였다(17쪽 상자기사 참사).

    당초 일본에서 거사 계획 … 지나친 경호탓 불발

    그러나 이후로도 황 비서는 홀몸으로 호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자 도쿄에 와 있던 안기부 공작 책임자 A씨가 초조한 표정으로 이 회장을 찾았다. 그는 대뜸 “이 쪽지를 황 비서에게 전하고 서명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일본 총리와 외무장관, 경시청장 앞으로 ‘한국으로 망명하고자 하니 도와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일본어로 쓰여 있는 쪽지였다.

    “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1997년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 황장엽·김덕홍씨.

    A씨는 “황 비서가 이 쪽지에 서명하면 이를 일본 측에 전달해 협조를 받아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이 북한을 의식해 오히려 황 비서를 북한으로 송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 회장은 쪽지를 안주머니에 구겨넣고 황 비서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드디어 시간은 흘러 2월10일이 되었다. 다음날이면 황 비서는 북한에 돌아가기 위해 도쿄를 떠나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 이 회장은 이렇게 된 이상 베이징에서 결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이 뜻을 황 비서에게 전하기 위해 백영중씨 명의로 ‘도쿄에서 돈을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못 드렸다. 무척 죄송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 황 비서님께 먼저 30만 달러를 전해드리게 할 테니, 꼭 받아서 공화국에 돌아가시기 바란다’라고 쓴 뒤 적당히 백씨의 서명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봉투에 넣은 뒤 뜯어보기 쉽게 살짝 봉한 후 문씨를 찾아 “미국에서 온 백 선생이 황 비서님께 전해달라는 편지입니다. 잘 전달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백씨를 알고 있는 데다 이미 이 회장에게 마음이 쏙 빼앗긴 문씨는 “염려 마십시오. 비서님께 전해드리고 5분 내에 말씀을 받아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한 뒤 사라졌다.

    그러나 15분이 지나도 문씨는 내려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 회장 앞에 문씨가 다시 나타난 것은 20분이 지난 뒤였다. 문씨는 편지를 되돌려주면서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직접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씨가 편지를 읽어보고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느라 늦은 것 같았다. 이 회장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대로 결과적으로 이 회장의 이 기지는 베이징에서 황 비서와 김덕홍씨가 문씨 등 수행원을 따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된다.

    이 회장은 문씨의 안내로 황 비서 방으로 가서 “미국의 백 선생이 전해주는 편지입니다. 보시고 한 말씀 해주시면 제가 전해드리지요”라고 말했다. 황 전 비서는 편지를 읽어보고 “잘 알겠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답했다.

    2월11일 아침이 밝아왔다. 이 회장은 아침 일찍 게이오플라자 로비로 나가 황 비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로비로 내려온 황 비서는 이 회장을 보더니 반갑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정한 작별 인사를 하려는 듯 이 회장의 손을 부여잡더니, 재빨리 손가락 사이에 숨겨둔 작은 쪽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회장은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이를 감추고 느린 동작으로 정겨운 포옹을 하고는 황 비서와 헤어졌다.

    이 회장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쪽지를 펼쳐보자 ‘베이징에서 나오겠소. 꼭 차를 준비해놓으시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황 비서는 자신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꼭’ 자에 굵게 동그라미를 치고, ‘차를 준비해놓으시오’ 밑에는 밑줄을 그어놓았다. 이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됐다”라고 환호했다.

    이 회장은 곧바로 공항으로 달려가 황 비서보다 두 시간 먼저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때쯤 베이징에서는 안기부 공작관 C씨가 김덕홍씨를 상대로 강력히 망명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즉시 택시를 타고 두 사람이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이 회장이 말없이 황 비서의 쪽지를 김덕홍씨에게 내밀자, 김씨는 이를 읽고 나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하시겠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C씨도 “이번에 같이 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선생이 위험해집니다”라고 거들었다.

    김씨는 곧 체념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쯤 황 비서가 탄 비행기가 베이징에 도착하고 있었다. 황 비서는 VIP이기 때문에 북한대사관 직원이 마중 나와 주중 북한대사관 안에 있는 숙소로 모셔갔다. 그 뒤를 따라 갖가지 형태로 위장한 안기부 공작관들이 주중 북한대사관 근처에 도착해 저녁 어스름처럼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김덕홍씨가 주중 북한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황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날 바로 북한대사관으로 들어가 황 비서를 데리고 나오면서 ‘망명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갈등이 망명 결심하게 된 계기

    그렇다면 황 비서가 한국 망명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중 하나는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그와 김정일 간의 심각한 갈등 관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던 황 비서는 9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에서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평양 당국으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황 비서는 모스크바종합대학 연설에 대해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나는 주체철학이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김정일에게도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얘기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박사를 받지 않았소. 그래서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마침 그곳에 가니 친구와 동포들이 자꾸 주체철학에 대해 묻기에 자세히 설명을 했지. 그런 문답은 보고하지 않는 게 상례인데 어찌되었는지 평양에 보고되면서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오.”

    그로부터 두어 달 뒤 노동신문이 화자(話者)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니는 자가 있다”고 비난하는 사설을 실었다. 비슷한 시기 인민군 신문인 국방일보도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위험을 감지한 황 비서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김덕홍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97년 1월13일 김씨에게서 연락을 받고 베이징으로 날아간 이 회장은 김씨한테서 황 비서가 처한 상황을 듣게 됐다. 이 회장이 망명을 권유하자 김씨는 “1월28일 황 비서가 일본에서 열리는 주체사상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나온다. 그때 황 비서와 진지하게 논의해보자”며 황 비서의 일본 방문 일정이 적힌 일정표를 이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안기부 해외공작 책임자 “새벽에 산책 간다고 빠져나오라”

    황 비서는 이 일정표대로 1월28일 베이징에 나왔다. 세 사람은 주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과거부터 그들이 만나오던 장소에서 만났다. 황비서는 수행원들을 다른 방에서 대기하게 했다. 황비서가 간략하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이번에 일 끝내고 북한으로 들어가시면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김 사장도 마찬가지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황비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내 생각도 그렇다. 이번 참에 망명을 결행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이 회장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곧 베이징 주중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시죠.”

    이 회장은 평소 황 비서가 미국에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이 김정일 체제를 더 빨리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황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내가 왜 미국으로 가? 북도 내 조국이지만 남도 내 조국이다. 나는 남에 있는 조국에 가서 북에 있는 조국을 합쳐, 하나의 조국을 만드는 일에 힘쓰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가라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이어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일본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며 구체적인 망명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 회장은 당시 안기부 해외공작 책임자 A씨가 때마침 베이징의 장성(長城)호텔에 체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회장은 아무래도 그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지금 베이징에 안기부의 해외공작 책임자가 와 있다. 그를 불러올 테니 상의해보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장성호텔로 가 A씨를 데리고 왔다.

    황 비서는 A씨에게 “일본에서 한국으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밝히고, “어떻게 행동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책임자는 “도쿄에 머무시는 호텔 주변에 우리 직원을 충분히 배치해놓겠습니다. 그 호텔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네댓 번 불을 켰다 끈 뒤 산책 간다고 하고 나오십시오. 그러면 우리 직원들이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라며 탈출 방안을 설명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속으로 웃었다. 2월 초면 길고 긴 밤이 이어지는 한겨울인데 누가 새벽 4시에 산책을 나가겠는가. A씨 설명대로 새벽 4시에 산책을 나가면 누가 봐도 수상히 여길 것이므로 조총련 청년들은 황 전 비서의 산책을 말리거나 그의 행동을 의심할 게 뻔했다.

    설명을 마친 A씨는 방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황 비서에게 “저와 사진을 한 장 찍어주십시오”라고 했다. A씨가 데리고 온 직원을 시켜 사진을 찍은 뒤 빠져나가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듣고만 있던 황 비서가 입을 열었다.

    “○○놈! 아니, 한겨울 새벽 4시면 오밤중인데 산책을 나가는 놈이 어디 있나!”

    황 비서의 생각도 이 회장과 같았던 것이다.

    이때 김덕홍씨가 거사를 늦추자고 주장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나와 4월에 망명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결국 김씨에게서는 망명한다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황 비서의 일정표를 들고 서울로 들어왔다. 1월30일 일본에 들어가 교토(京都)와 나가노(長野)를 거쳐 도쿄로 올 예정인 황 비서 일정에 맞춰 2월4일 도쿄로 날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황 비서 망명은 도쿄가 아닌 베이징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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