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6

2004.12.30

수능보다 어려운 문제 ‘유혹과 性’

  • 입력2004-12-23 12: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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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보다 어려운 문제 ‘유혹과 性’
    하루 이틀의 뉴스거리로 그칠 줄 알았던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 사태가 결국 사상 초유의 교육 스캔들로 기세를 확장한 채 다음 해를 바라보게 됐다. 조직적인 문자메시지 커닝에서 성과급 대리시험까지 다양하게 동원되었던 부정 수법은 응시자 300여명의 성적이 무효 처리되는 선에서 정리되고 있는 모양이다.

    입시라는 인생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무너져내린 아이들의 윤리의식이 못내 씁쓸하다. 자기 안의 도덕, 혹은 세상의 법을 무너뜨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이나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고민해도 늦지 않을 텐데, 허접스러운 이유로 너무 일찍 주저앉은 것이다.

    윤리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에 대한 회의나 도전은, 거짓말을 궁리하던 유치원 시절부터 커닝을 탐하던 입시생 처지를 지나 여전히 지난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규범과 사회 규범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비교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성과 관련된 문제부터였을 것이다. 대개 여성들은 섹스에 관한 태도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으로서 자신을 재정립하게 마련이다.

    또래 여성들의 연애관은 상당히 분열적이며 극단을 치닫는 경향이 있다. 한쪽 끝에는 모든 연애행위가 결혼과 연결되는 선상에서만 존재할까 말까 하는 집단이 있다. 서른이 넘도록 섹스는커녕 변변한 데이트 한번 못해봤다는 청춘들이 꽤 된다. 능력이나 기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애에 수반되는 동물적인 인상이 학교나 교회 등에서 배우던 고결한 영성(靈性)에 위배되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남편이 나를 만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퀸카’ 동생들도 두어 명 만나보았다. 성을 억압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탓이라기보다 섹스가 연애나 결혼에서 차지하는 교환가치로서의 위대한 기능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반면에 다른 한쪽 끝에는 섹스가 연애 감정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를 전혀 개의치 않는 이들도 있다. 유부남과의 연애나 ‘원 나이트 스탠드(하룻밤 사랑)’ 모두 즐거우면 그만이다. 그 능력을 밑천 삼아 용돈과 생활비를 조달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연애가 직업이 돼버린 사람도 여럿 안다. 스와핑과 같은 별스러운 연애 경험까지 시도하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전설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래도 며칠 전에 만났던, 남부럽지 않게 파란만장한 연애담을 가진 후배는 “서른 살을 바라보니 이제는 마음이 가는 남자들하고만 자야겠다”며 새삼스러운 결심을 내비친다. 아무래도 연애의 끝에는, 결혼이라는 강력한 법칙이 개입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선택한 성 윤리에 대한 응징이나 보답은 결혼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 아닌가.



    결혼으로 강력히 규제되는 여성들의 성에 비하면, 남성들이 성을 대하는 태도는 윤리보다 쾌락에 가까운 편이다. 성을 상품으로 매매할 수 있다는 것이 통념이 되었고, 연애와 제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도 큰 상처 없이 빠져나오기가 쉽다. 남성들의 성은 도덕적 책임과 무관한 즐거운 놀이로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성 윤리를 포함한 온갖 도덕 규범들의 시험장과도 같다. 그들과 다른 성의식을 요구받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마 나와 같은 싱글 여성이라면 경제적인 문제에 앞서 혼자 사는 여자라고 만만하게 생각해 뻗쳐오는 유혹에 곤란을 먼저 실감했을 것이다. 이에 딱 부러진 정답이 있겠냐마는 욕망과 현실을 함께 직시하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쪽이 후회가 적다 하겠다.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도덕적인 선택의 맥락이라면 연애를 하거나 않거나 무슨 문제가 되랴. 외부적인 질서나 규범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안의 힘을 보탤 수 있는 도덕이 돼야 한다. 수능에 나오진 않지만 반드시 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삶을 사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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