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4

2004.12.16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 입력2004-12-10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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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변영주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그는 키가 크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180cm가 넘는 것 같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그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2편이 나온 1997년,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원래 속편 기획은 없었는데, 영화를 본 할머니들이 스스로 속편 이야기를 구성하는 바람에 ‘할머니들에게 등 떠밀려’ 찍었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 때 할머니들은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것도 치욕스럽고 억울한데 카메라 앞에 얼굴까지 공개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을 터. 변영주 감독은 매일 아침마다 당시 ‘나눔의 집’이 있던 서울 혜화동으로 출근해 마당의 풀도 뽑고, 할머니들 싸움도 말리며, 할머니들 머리의 이도 잡아주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하고 나니까 비로소 할머니들이 촬영을 허락해주었다.

    결국 ‘낮은 목소리’는 ‘숨결’까지 해서 모두 3부작으로 끝났다. 그리고 변 감독은 극영화 준비를 서둘렀다. 첫 번째 장편 극영화는 김윤진 주연의 ‘밀애’였다. ‘의식 있는’ 여성감독으로 알려진 그가 불륜을 테마로 들고 나오자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국 ‘밀애’는 전국 관객동원 40만명에 그쳤다. 그러나 김윤진에게는 청룡영화제, 여성영화제, 감독협회 등에서 주는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밀애’에 이어 두 번째 작품 … “교육, 아이들에게 맡겨보자”





    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인 ‘발레교습소’는 스무 살 시절의 청춘을 그리고 있다. 현재 스무 살을 막 지난, 혹은 그 시기에 있는 관객들과 20년 전 그 시기를 거친 자신의 감성이 만나는 어떤 접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영화의 진정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김윤진 주연의 ‘밀애’.

    -당신의 스무 살은 어땠나?

    “주위에서 갑자기 ‘너 이제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 담배를 배웠고 술을 마셨고 종로에 가서 어학 공부한답시고 부모님한테서 ‘돈을 빼앗아’ 노량진에 가서 성룡 영화를 보며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스무 살도 당시 나와 비슷한 감성일 거라고 믿는다. 다만 지금은 물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김지하 시집을 읽으며 그 감성을 얻었던 것과 휴대전화를 이용하며 얻는 만큼의 차이는 있다.”

    -스무 살 이후에는?

    “80년대 우르르 현장 가고, 공장에 갔다. 나도 공장 갔다가 3일 만에 나왔다. 힘들어서였다. 아이스 바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너무 힘들었다. 엄지손가락이 잘릴 것 같았다. 신념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육체 때문에 무너지니까 스스로도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내가, 체 게바라가 될 줄 알았다. 결국 생각해보니까 나하고 조직 활동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사법시험 준비도 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보글보글이라는 오락게임이다. 공룡이 풍선 쏘고 나쁜 놈들을 풍선에 가두어서 터뜨리면, 그것이 먹을 것으로 바뀐다. 100판까지 했다. 소프트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끝이다. 마지막에는 고릴라가 나온다. 아무리 쏴도 안 죽는다.”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낮은 목소리’

    -영화를 만난 계기는?

    “집에서 어느 순간 ‘뭐든 하라’고 했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확 낮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나는 뭘 해도 잘 안 될 거야, 내 인생은 뭘 해도 안 되게 돼 있어.’ 그런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하고 싶은 거 하다 안 되면 억울하지나 않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지 않으니까 결정이 쉽게 났다. 하루 만에 결심해서 다음날 8mm 카메라를 사 들고 나갔다.”

    -다음날 바로 무비 카메라를 살 정도면 집안이 잘살았나 보다.



    “그렇다(그는 인터뷰 장소도 평소 자주 가는 청담동 카페로 정했고, 구찌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다). 그리고 일본의 오가와 신스케 감독 사무실로 팩스를 보냈다. ‘카메라를 빌려줘’라고. 그랬더니 ‘빌려줄 테니까 와서 가져가’라는 대답이 왔다. 그래서 카메라와 장 뤼크 고다르가 쓰던 녹음기를 빌려 그것으로 ‘낮은 목소리’를 찍었다. 영화집단 ‘장산곶매’의 선배들 중에는 부모 부양 때문에 영화를 그만두고 방송으로 간 사람들이 많다. 나는 감독이 되었지만, 내 능력 때문이 아니다.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만 책임지면 되니까, 남들보다 편안한 삶을 살았으니까, 적어도 영화 할 때는 편한 삶을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가?

    “얼터너티브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 또한 강압적인 것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사람들을 우월하게 보거나, 대안 교육을 우월하게 보는 지식인적인 방식이 나는 싫다. 우리는 자꾸만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만든다. 그러면 아이들은 초조해진다. 30대가 되면 대부분 기성세대가 된 것처럼 산다. 그럼 50대에 은퇴할 것인가?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진지한 것이 옳다고 스스로 생각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지도편달을 하려고 한다. 그런 건 재미없다. 내 생각은 기본적으로 아이들 스스로에게 맡겨보자, 간섭하는 게 많은 문화 속에 내버려두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발레교습소’인가?

    “발레 영화로 생각하고 오시면 죄송하다. 스무 살 아이들이 평소에 길을 가다 만나는 동네의 허접한 ‘루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실패한 인생과 만나는 공간이 필요했다. 별것 아닌 아저씨 아줌마들한테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스무 살 아이들이 성적인 감성은 예민하지만, 막상 자기 몸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는 기회는 드물다. 그래서 몸이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다. 또 아무리 배워도 자기 인생에 추호도 도움 되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발레를 생각했다. 그리고 동네 구민회관에서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어른들이 혹은 세상이 규정하는 삶 말고 다른 어떤 것을 쳐다보는 공간이 필요해서 발레교습소라는 공간을 떠올렸다.”

    -피날레의 발레 공연은 너무 어설프다.



    “아이들이 발레를 잘할 수는 없다. 공연을 잘해야 아이들의 삶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제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발레 공연이 마치 동네 송년회 분위기를 낸다 해도 그것으로 좋았다.”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발레교습소'의 시사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변영주 감독과 주인공 김민정, 윤계상(왼쪽부터).

    -왜 동성애 캐릭터를 삽입했나?

    “얼굴에 동성애라고 쓰여 있는 캐릭터는 싫다. 이성애를 선택하는 것처럼 동성애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것은 없다.”

    -첫 경험 신이 너무 길지 않은가?

    “작정하고 첫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첫 경험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처음 하는 것이지만 동영상 자료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면 어떻게 할 것이라고 미리 생각해둔다. 때문에 겁을 내서 그렇지 서툴지는 않다.”

    “실패한 인생과 만나는 공간 필요 … 영화 어려움 실감”

    -god의 윤계상을 캐스팅한 것은 상업적 이유 때문인가?



    “열아홉 살을 연기할 수 있는 남자 배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윤계상의 화보를 보고 이 친구가 왜 영화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나러 갈 때, ‘만약 가수가 영화 출연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내쫓자’ 이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까 윤계상 역시 ‘내 상업성을 고려하는 감독이라면 하지 말자’ 그러면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며칠 뒤 ‘제 자존심을 모두 걸겠습니다’라고 쓴 e메일을 보내왔다. 어쩌면 언젠가 그의 첫 영화가 ‘발레교습소’였다는 게 내게 영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신인들이 많은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이 친구들의 공통점이 진정성은 있는데 계산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계산을 하면 맛이 안 난다. 계산을 못하면 리듬감이 안 산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카메라 워크를 거친 핸드 헬드(Hand-held·카메라 들고 찍기)로 나갔던 이유가 그 부분을 덮어주기 위해서였다. 핸드 헬드는 캐릭터에게 리듬을 주고, 그 리듬이 영화적 방식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점을 덮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추억이 녹아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정돼 있지 않다. 대학 4학년 때, 평생 같이 지낼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실연했다. 술 많이 마시고 택시 타고 가는데, 옆 차선의 트럭 운전기사가 담배를 던졌다. 그게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내 가슴을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쓰레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진이가 맞는 부분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민재가 아버지와 공을 던지는 라스트 신은 갈등이 풀리는 중요한 부분인데 좀 미흡하지 않은가?



    “그 장면의 핵심은 아버지가 처절하게 패배하는 것, 남자 대 남자로 붙었다가 처절하게 패배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진유영씨는 끊임없이 화해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싶어했다.”

    좌절한 청춘   이여! 아직 늦지 않았다

    변영주 감독의 단골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스무 살, 혹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좌절한 스물다섯 살 청춘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그냥 지금의 삶에서 한 걸음 걸어나가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여전히 스스로가 한심한 20대들에게 나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연출료는 얼마나 받았나?

    “흥행에 실패한 감독은 얼마 못 받는다. 5000만원 받았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영화를 만든다는 게 어렵고 힘들고 미칠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이렇게 필름을 많이 허비하다니,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도 다음 영화 기획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언제나 첫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바치지만 대중과의 소통은 쉽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대중이 원하는 것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부분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한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경계선에 서는 짓은 계속 할 것 같고, 이제 겨우 서른아홉인데 뭘. 극 영화 두 편밖에 하지 않았는데. 꾸준히 하다보면 작가로서 변영주의 욕망이 부딪쳐서 성공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관객에게 사랑도 받고. 그러나 기회조차 잃으면 어떻게 하지?”

    (대담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그가 말하는 것을 옮겨 적는 일뿐이었다. 문장을 손볼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의 영화보다 그의 말이 훨씬 좋았다. 앞으로 그의 영화가 그의 말보다 더 좋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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