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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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춤추는 콤파드리토

  • ‘all of dance’ PAC 대표 choumkun@yahoo.co.kr

    입력2004-12-02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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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이방인, 춤추는 콤파드리토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일상 속으로 급격히 파고든 서양문화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재즈와 와인, 그리고 춤이다.

    이 말에 재즈와 와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춤은 그전부터 있던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라틴댄스는 그렇지 않다. 그중에서도 배우기 어렵다는 탱고!(사진) 다른 춤과 달리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엇인가 울컥 끄집어내는 마력을 지닌 이 춤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탱고의 기원지는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아르헨티나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으려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출신의 이민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이민 2세대들을 ‘콤파드리토(compadrito)’라고 하는데,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나 뿌리가 그 땅이 아니기에 어느 곳에도 융화되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이들의 삶 속에서 아메리카 본토의 춤과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춤이 만나고, 고달픈 일상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태어난 춤이 바로 탱고다.

    탱고는 ‘닫힌 공간’ ‘제한된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어원으로도 알 수 있듯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중시하는 춤이다. 뿌리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사는 외로운 사람들의 감성이 오고 가기에 탱고는 격렬하면서도 부드럽고, 에로틱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탱고바(밀롱가)가 있는 곳은 독일 베를린이라고 한다. 서울에도 탱고를 즐기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꽤 많다. 도심의 주변, 뒷골목에서 싹을 틔운 탱고가 오늘날 도시 한복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왜일까.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외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몸과 몸이 만나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위무해주는 탱고를, 때로는 자연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탱고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낯선 도시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자신이 바로 콤파드리토들인지도 모른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예술의 전당에서 ‘포에버 탱고’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일반 춤 공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젊고 늘씬한 근육질의 무용수들이 나와서 기량을 마음껏 자랑하는 보통의 공연과 달리, 가슴둘레보다 허리둘레가 더 큰 50대 중년 신사가 보여주는 탱고는 그야말로 삶이 묻어나는 감성의 춤이었다. 객석의 관객들은 그 중년신사가 전해주는 인생의 시간을 함께 느끼며, 때로는 전율하고 가끔은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과 애환, 서러움과 고통이 반도네온(탱고 반주에 쓰이는 작은 손풍금)의 선율 속에서 묻어났고, 얼굴과 얼굴을 맞댄 남녀의 절절한 가슴은 선율 위에서 춤을 추었다.

    차가운 바람이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게 만드는 계절, 계핏가루를 얹은 뜨거운 포도주 한잔이 생각나는 겨울의 문턱에서 피아졸라의 ‘리베트 탱고(Libertango)’를 떠올리는 것은 나 역시 영원한 이방인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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