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2

2004.12.02

부시와 찰떡 궁합 라이스 시대 ‘활짝’

‘국무장관’ 지명으로 날개 단 격 … 일부선 실용주의자 평가, 네오콘과 다를 것 시각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11-25 1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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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와 찰떡 궁합 라이스 시대 ‘활짝’

    노무현 대통령이 7월9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한국을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11월1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와 국방위는 ‘콘돌리자 라이스 품평회’를 방불케 했다. 라이스는 2005년 1월 출범하는 미국의 부시 2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 자리에 앉는다. 여야를 따질 것도 없이 의원들은 ‘강경하다’는 표현에 방점을 찍었다. “라이스는 강경파인데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하게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임종인 의원) “‘매파’라고 하던데….”(김원웅 의원)

    그러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답변은 의원들의 ‘걱정’과 조금 달랐다. 그는 라이스 장관을 실용주의자, 현실주의자로 묘사했다. “라이스 장관을 강경파라고 볼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을 보좌해온, 온화하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학자 출신으로 알고 있다. 인상이 매우 쾌활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정통하고 한국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를 ‘콘디’라고 부른다.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의 관계는 정치적 동반자니 가정교사니 하는 말보다 ‘베스트 프렌드’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미혼인 그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대통령 가족과 주말을 함께 보낼 정도로 부시 대통령과 가깝다. 장관이기에 앞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붕우(朋友)인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가름짓는, 더 나아가 세계사의 축을 바꿔놓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른 라이스에겐 ‘강경파’라는 수사가 따라붙곤 한다. 부시는 그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하면서 “세계는 미국의 힘과 호의, 품위를 볼 것”이라고 했다. 라이스의 힘, 호의, 품의는 북핵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콘디에 대한 오해와 진실은?

    미국 대중에게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 출신 배경의 한계를 뛰어넘어 최고를 지향한 그는 여성 최초로 국가안보보좌관에 올랐고 흑인 여성 최초로 국무장관을 맡게 됐다. 그는 곧잘 미 오페라사 최초의 흑인 성악가 마리언 앤더슨이나 메이저리그에서 뛴 첫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과 비견된다.



    미국 사회 일각에선 그를 대통령감으로 꼽기도 한다. “대통령이 될 인물”이라는 찬사는 주로 여성단체에서 쏟아진다. 사회학자 카미유 파글리아는 “대통령 후보로서 군사제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큰 장점”이라고 했다. 라이스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강한 확신을 갖고 계셨다. 내가 가게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일은 못해도 미국 대통령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천재성으로 대학 때부터 ‘두각’ … 아버지 부시에게 ‘소련’ 가르쳐

    라이스는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자랐다. 1950~60년대 앨라배마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부에서도 흑인들이 살기가 가장 힘겨운 곳이었다. 흑인은 백인에게 악수를 청할 수도, 공공장소에서 흑인끼리 애정표현을 할 수도 없었다. 또 차를 탈 때도 뒷자리나 화물칸에 올라야 했을 정도로 불우했다. 라이스 역시 고등학교 1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백인과 함께 교육받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뿌리는 남루하다. 고조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노예로 일했고 고조모는 흑인의 대표적 직업이던 하녀였다. 그러나 라이스가(家)는 ‘미국은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나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흑인에게 최선의 기회는 교육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챈 것. 라이스는 “백인 여성이라면, 흑인 남성이라면 하는 가정을 하며 소비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라이스가 소련 문제 대가로 거듭나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스탈린학’을 듣고 나서다. 소련학은 이후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미국 언론은 그를 ‘반짝이는 능력의 소유자’ ‘특별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묘사한다. 머리 좋은 학생이 대개 그렇듯, 라이스가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남들이 2~3주 걸려 마치는 과제를 2~3일에 끝내고 클럽에서 파티를 즐기는 일도 잦았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도 아침강의를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흑인이라는 ‘출신 성분’이 한계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라이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는 피부색이 적지 않은 구실을 했다. 대학 졸업 후 26세의 나이에 그는 스탠퍼드 대학 ‘국가안보 및 군비감축 연구소’에 자리를 얻는다. 스탠퍼드 대학은 소수인종 정책에 맞출 수 있는 흑인 여성교수를 찾은 것이지, 소련 전문가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자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다.

    이후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 ‘소련’을 가르치면서 국제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 라이스는 경외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답한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라고. 라이스 스스로도 냉전의 마지막 장에서 소련 해체를 조율하고 독일 변화를 주도하며 미국과 우방국을 도운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 라이스를 아들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아버지 부시다. 98년 여름 대선 출마를 고민하던 젊은 주지사와 라이스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99년 말 선거 진영이 구축되자 라이스는 부시 특보로 임명된다.

    라이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합리적인 현실주의자’라는 데 모아진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유학 시절 라이스를 만난 고려대 염재호 교수(행정학)는 “브라이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출신 대학이 스탠퍼드 대학에 비하면 다소 떨어지는 덴버 대학인 데다 워낙 어린 나이(26세)에 교수가 됐기 때문에 흑인 여성에 대한 배려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 동료 교수는 “라이스는 국가 간 관계를 적대 관계라기보다 자국의 이익을 늘리기 위한 게임으로 본다. 냉전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외교부 관계자들도 라이스를 강경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외교부 한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파월은 온건파, 콘디는 강경파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미국에서는 라이스를 중도라고 평가한다.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뛰어난 ‘학자’라는 것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무슨 사안에 대해서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라이스는 교수들이 반바지를 입고 강의할 정도로 캐주얼한 분위기의 스탠퍼드 대학에서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염 교수는 라이스가 스타일리시한 정장 차림을 즐겨 늘 활기 넘치는 파워 엘리트 인상을 풍겼다고 기억했다.

    현재로선 라이스가 현실파 중도주의 노선을 따를 것인지 매파 입장에 설 것인지는 예측키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부시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물론 부시의 생각은 라이스의 견해일 수도 있다. 파월은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미국 언론은 라이스가 파월의 복사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에 대한 부시의 신뢰를 미뤄보면 키신저에 버금가는 국무장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이스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거리를 두고 있다. 어떤 때는 파월 편을 든 적도 있다. 다만 ‘힘의 사용’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임은 분명하다. 부시 행정부 초기 “자기 목소리 없이 교통정리나 한다”는 비판을 들은 것은 이 때문이다. 라이스가 펼칠 외교정책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북한과 이란의 정권교체를 노릴 것”이라며 강경에 무게를 뒀고, 뉴욕타임스는 “북한에 더 많은 혜택을 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더욱 강경해질 것이라는 전망은 대체로 그가 걸어온 길에 기인한 것이고, 네오콘과 조금 다른 정책을 견지할 것이라는 견해는 부시를 움직일 수 있는 라이스의 힘에 근거한다. 라이스는 냉전 종식과 공산권 몰락이라는 세계사의 극적인 순간을 최중심부에서 직접 기획하고 결과를 관람했다. 자고 나면 한 국가의 체제가 바뀌는,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을 목도한 것이다.

    대북 정책은 타협 불가론 … 우리 정부와 이견 불거질 수도

    라이스는 “역사에 교훈이 있다면 결국 작은 힘은 큰 힘에 종속되고 만다”고 한 바 있다. 이를 그대로 대입하면 북한은 정권교체 대상이다. 라이스는 또 소련 전문가로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이라크전쟁에 앞장섰다. 이라크전쟁에 부정적이던 유럽 동맹국들을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르몽드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유임과 라이스 보좌관의 부상은 유럽 지도자들에게 나쁜 소식”이라고 지적했다.

    라이스의 대북 정책은 타협 불가론으로 요약된다. 그는 북미 양자 접촉을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개성공단을 통한 대북 경협도 구미에 맞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과는 틀 자체가 달라 한미 간의 이견이 불거질 수 있는 대목. 라이스는 공개적으로 북핵 문제의 데드라인을 언급하기도 했다. 라이스의 양자 협상 불가론은 궁극적으로 북한 붕괴론과도 맥이 닿는다.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라이스의 뿌리깊은 반감도 노무현 정부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라이스가 동맹국 끌어안기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 또한 적지 않다. 이념적 색채가 엷은 터라 부시의 마음을 움직여 유럽의 동맹국을 끌어안고 북한과 이란을 외교적으로 설득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 라이스가 현실주의자이며 동맹이 필요한 미국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 부시를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라는 점에 근거한 분석이다. 앞서 언급했듯 부시와 라이스는 단순한 대통령과 장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라이스는 ‘힘의 우위’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임은 분명하지만 미국이 세계를 통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여전사’는 아니다. 부시 행정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할 때 라이스는 양쪽의 의견을 모두 가감 없이 전달해 부시에게 최종 결정을 하도록 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을’ 국무장관 라이스는 한국에 ‘매’가 될 수도 ‘비둘기’가 될 수도 있다. 고려대 현인택 교수(정치학)는 “파월과 달리 부시와 코드가 맞는 그는 부시를 설득할 수 있어 보인다”면서 “한국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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