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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룡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진 사퇴 없는 한 내년에도 삼성 감독 … 야구 인생 ‘올인’ 승장으로 퇴진 계산 중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김응룡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응룡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김응룡 감독.김감독이 시드니올림픽 한·일전에서 심판에 항의하고 있다.해태(왼쪽)와 삼성 선수들이 우승을 이끈 김응룡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왼쪽부터)

코끼리 감독의 최후는 왔는가?

각 종목별로 명감독들은 국내 대회뿐 아니라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국내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이 명감독의 필요조건이라면, 국제대회 성적은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명감독으로 꼽히는 박종환 감독은 아마추어 시절 서울시청팀을 이끌고 17차례나 우승을 차지했고, 프로축구에서도 천안 일화(현 성남 일화)에서 프로축구 사상 최초로 1993년부터 95년까지 3연패를 이뤄냈다.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는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4강에 올려놓았다. 여자배구의 김철용 감독은 80년부터 일신여상에서 배구감독 겸 체육교사로 118연승을 일궈냈다. 이후 호남정유(현 LG정유)에서 배구대회 9년 연속 우승과 9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일본에 패하는 등 만신창이가 된 여자배구 대표팀을 이끌고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해 8강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록을 올려 세계 배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프로야구 최고 명감독은 누구일까.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구세대인 김응룡 감독(삼성 라이온즈)과 신세대 대표주자 김재박 감독(현대 유니콘스)을 떠올릴 것이다.

김응룡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 시절 9회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1회를 포함해 모두 10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올 시즌 현대 유니콘스를 정상으로 끌어올린 김재박 감독이 이제 겨우 4회로 다승 부문 2위를 달리고 있다. ‘최소한’ 2010년까지는 김감독이 프로야구 최다 우승감독 기록을 확보해놓은 것. 또한 김감독은 86년부터 89년까지 4연패라는 쉽게 깨지기 힘든 기록도 갖고 있다. 반면 김재박 감독은 2003년에 이어 올해 우승으로 이제 겨우 2연패를 이뤘을 뿐이다. 그런데도 김응룡의 시대는 갔고, 김재박의 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언론은 공공연히 김감독의 퇴장을 종용하기도 했다. 과연 김감독의 시대는 끝났는가.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금자탑

김감독은 냉혹함과 포근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 2000년 해태 감독 시절 중국 광저우(廣州)에서의 전지훈련 때 일이다. 식당에 갔다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을 본 김감독은 왠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며 주머니에 있던 돈을 몽땅 털어 건넸다. 조선족 여인이 뜻밖의 횡재에 감격스러워했음은 물론이다. 그때 김감독은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이를 떠올렸다고 한다. 83년 KBS에서 남북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했을 때 김감독은 눈이 퉁퉁 부은 채 훈련장에 나타나곤 했다. 숙소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TV를 지켜보며 운 탓이다.

그러나 김감독은 위기에 몰리면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이내 실천에 옮긴다. 93년 하와이 전지훈련 때의 일이다. 이순철 현 LG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이 일부 코치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에 반기를 들고 훈련지를 이탈하고자 하는 항명사건이 있었다. 감독직마저 위태로웠던 김감독은 하와이에서 간신히 사태를 수습한 뒤 귀국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구단에서 김감독 행방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며칠 만에 광주로 돌아온 김감독은 당시 마의웅 해태 타이거즈 사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구단에서 사건의 중대성을 감지하고 문제가 됐던 코치와 선수를 제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김감독이 선수를 친 것이다. 문제가 불거질 경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김감독 자신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감독은 어떤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김응룡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응룡 삼성감독

11월1일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 삼성이 현대에 7대 8로 패해 준우승이 확정된 직후 그는 기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감독 자리에 남아 있을 거냐)”는 질문을 던지자 “구단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김감독은 2000년 시즌 직후 삼성 라이온즈와 5년간 계약할 때 “김감독이 사퇴를 하지 않는 한 팀에서는 경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따라서 구단은 김감독에게 그만두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삼성은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 3위 정도의 전력으로 분류됐다. 김감독은 패장으로 물러나기보다 삼성에서 자신이 마지막 지휘봉을 잡게 될 2005년 시즌에 ‘올인’해서 우승을 차지한 뒤 명예롭게 물러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위기 몰릴 때 냉철한 판단과 실천

김감독이 이대로 패장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좋은 예가 있다. 김감독이 이끌던 해태의 전성기는 86년부터 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속 우승을 차지할 때였다. 당시 해태는 선동열이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마운드를 이끌었고, 김성한 한대화 등 당대 최고의 타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4연속 우승의 대기록을 세운 이듬해인 90년 플레이오프에서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삼성에 패한 것이다. 그날 김감독은 숙소인 대구 수성 관광호텔에서 선수들에게 일일이 “지난 1년 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소주잔을 돌렸다. 그리고 선수들 앞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불안한 음정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팀가(歌)나 마찬가지인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김감독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모든 선수들이 목포의 눈물을 따라 부르며 울었다.

앞서 명장은 국내외 성적이 모두 좋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김감독은 국제 대회에서도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감독으로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해 한국야구 사상 최초로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김인식, 강병철 코치와 함께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동메달을 따냈다. 물론 한국야구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었다.

그러나 김재박 감독은 2003년 11월 일본 삿포로구장에서 벌어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 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 감독으로 출전해 뼈아픈 실패를 맛보았다. 김감독은 대만전에서 당시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매 경기 출전했고, 또 뒤늦게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SK 와이번스 조웅천 투수를 마무리로 기용했다. 이 무리수 때문에 대만에 통한의 역전패(4대 5)를 당해 결국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었다. 김감독이 대만 쉬셩밍 감독의 한 템포 빠른 판단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만약 한국팀 사령탑이 김응룡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한국야구 최고의 승부사 김응룡 감독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질 2005년 시즌이 기다려진다. 한국시리즈에서 김응룡 김재박 감독이 다시 만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주간동아 460호 (p76~77)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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