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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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청약통장 파시죠”

모집책까지 두고 ‘떴다방’서 무차별 매수 … 분양권 전매 가격에 반영 실수요자 부담만 늘어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11-15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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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님, 청약통장 파시죠”
    “OO이 엄마, 청약통장 있지. 어떻게 할 거야?”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에 사는 주부 한모씨(54)는 얼마 전 같은 아파트 동 대표 김모씨(여·56)로부터 청약통장을 팔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1순위 청약부금 통장을 얻는 대가로 김씨가 제시한 가격은 예치금 외에 최고 400만원. 무려 43.4대 1의 평균 경쟁률을 보인 지난 1월8일 서울지역 12차 동시분양 청약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던 한씨는 별 고민 없이 청약부금 통장 판매를 결정했다.

    얼마 후 한씨는 아파트 반상회에 나갔다가 자신처럼 김씨에게 청약통장을 판 사람이 같은 동에만 10여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청약부금은 300만~400만원, 청약예금은 500만원, 청약저축은 800만~1000만원 등 웃돈의 가격도 각기 달랐다. 알고 보니 김씨는 무더기 차명청약으로 아파트 청약률을 조작한 뒤 프리미엄을 챙기는, 이른바 ‘떴다방’의 청약통장 모집책(청약 뚜)이었던 것. 그녀는 통장 한 개당 20만원씩 알선 수수료를 받고 아파트 전체의 청약통장을 매집한 뒤 부동산업자에게 청약통장을 통째로 넘겨주고 있었다.

    매매 알선 땐 2~3년 이하의 징역

    무주택자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실시된 주택청약제도는 이처럼 청약통장의 불법 거래와 알선 행위가 극에 달하면서 유명무실화되고 있다. 아파트마다 청약통장 모집책인 ‘청약 뚜’가 활개치고, 인터넷은 물론 각종 생활정보지까지 떴다방과 알선책들의 청약통장 매집 광고가 버젓이 올라온다. 지난해까지 분양 모델하우스 현장에서만 이루어지던 떴다방의 청약권 매집이 이제 주민들의 생활 속까지 침투하면서 아파트 가격과 청약률 폭등을 이끌고 있는 것.



    문제는 청약통장 소지자들이 이 통장의 거래가 명백한 불법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분양권 전매 금지 조치는 지난 98년 정부가 부동산시장의 경기 부양을 위해 전면 해제했지만 청약통장의 매매나 알선은 현재까지도 주택건설촉진법과 부동산중개업법에 2~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위법행위. 청약통장 모집상들은 일반인이 분양권 매매와 청약통장 매매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용해 이들에게 불법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무주택자에 한해 1세대 1통장으로 제한됐던 청약통장 가입 자격이 성인이면 누구나 들 수 있도록 완화된 2000년 3월 이후, 물밀듯 청약통장을 얻은 130만명의 사람이 올 3월부터 모두 청약 1순위(가입기간 2년)가 되면서 청약통장 밀거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리 차명통장을 수백개씩 확보해 두지 않을 경우 일반 수요자의 청약 폭주로 자신의 분양당첨률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떴다방들이 대대적인 통장 매집에 나선 것.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H아파트 분양 모델하우스에서 만난 떴다방업자 김모씨는 “3월부터 청약률이 2배 이상 오르기 때문에 청약통장도 지금의 2배 이상 확보해 두지 않으면 통장을 산 원금조차 건지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다”고 털어놓았다.

    여기에다 떴다방에 기생해 이득을 취하는 일반 부동산업자들이 생겨나면서 청약통장 밀거래 시장 규모는 더욱 커졌다. 떴다방의 이런 속사정을 눈치챈 일부 악덕 부동산업자들이 청약통장 거래의 중간 유통업자로 등장한 것. 이들은 인근 아파트마다 통장 모집책인 ‘청약 뚜’ 아줌마를 건당 10만~20만원의 수고비를 주는 방식으로 심어놓거나, 생활정보지와 인터넷에 광고를 내고 청약통장을 직접 매집한다. 이렇게 모집한 청약통장은 떴다방들에게 웃돈이 붙어 한꺼번에 팔리고, 떴다방들은 이들에게 준 웃돈을 당첨된 분양권의 전매가격에 그대로 반영한다.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면서 생긴 마진이 실수요자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셈.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1월10일 지난해 12월부터 인터넷 광고와 생활정보지 등을 통해 다른 사람 명의의 청약통장을 예치금 외에 300만~1000만원씩 주고 사들여 떴다방에게 웃돈을 받고 되판 혐의로 부동산업자 3명과 이들의 모집책 노릇을 한 주부(청약 뚜)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사이버수사대의 한 관계자는 “이들을 입건한 후 생활정보지나 인터넷에 의한 청약통장 거래는 거의 사라졌다”고 밝혔다. 과연 그럴까.

    1월28일자 생활정보지 ‘××시장’의 부동산면. 경찰의 주장과 달리 ‘청약통장(저축, 예금, 부금 6회 이상) 최고가 현금 즉시 처리’ ‘청약통장 최고의 조건으로 친절 상담’ ‘상담환영 최고가 신속출장’ 등 청약통장 매집 광고가 5개나 실려 있다. 이중 한 곳에 전화를 걸어 업자를 만났다.

    자신을 ○○부동산 사장으로 밝힌 이 업자는 “당장 팔 것은 아니고 가격대를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하자 다짜고짜 “지금 팔지 않으면 3월부터는 청약통장 값이 폭락할 것이다. 벌써 통장 값이 떨어지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팔아라”고 통장 판매를 강권했다. 3월에 1순위 청약통장이 쏟아져 나오면 통장가격도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사모님, 청약통장 파시죠”
    또 다른 업자 이모씨는 “국세청의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빨리 처분하는 게 좋다”며 세무조사 핑계를 댔다. 그에게 “얼마 전 단속이 있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벌금 얼마 내면 되는데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답했다. 이 밖에도 ‘××수’ ‘××로’ 등 각종 생활정보지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이들 청약통장 매집업자들의 광고가 끼여 있다.

    이상한 점은 이들이 짜기라도 한 듯, 통장 거래 가격이 거의 비슷한 가격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사실. 1월31일의 경우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의 국민주택만 청약할 수 있는 청약부금은 300만원, 평형에 따라 자유자재로 청약할 수 있는 청약예금은 500만원, 평형에 관계없이 청약이 가능하고 각종 임대아파트 청약에 우선 순위가 있는 청약저축은 800만원에 가격이 고정돼 있었다. 이들이 서로 연락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인터넷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이곳에선 아예 부동산업자가 ○○부동산 등 업체 상호를 적시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경우도 있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주부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모델하우스에서 명함을 돌리고 있는 아줌마가 청약 뚜들”이라며 “모델하우스 공개일은 떴다방과 청약통장 중간모집상, 그 밑에 있는 청약 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경찰 인력으로는 단속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는 주택건설 정책이 수정되지 않는 한 근절되기 힘든 문제다”며 단속의 책임을 건설교통부로 돌렸다.

    이에 대해 건교부 주택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현실을 충분히 알고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청약할 때는 반드시 청약자의 이름으로 분양금의 10%를 내도록 하는 분양 증거금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수백개의 통장을 확보했더라도 수십억원에 달하는 증거금을 한 번에 내고 청약할 수 있는 떴다방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고 주택청약제도가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위한 것인데 청약할 때마다 수천만원씩 선수금(증거금)을 내라면 어떤 사람이 청약에 나서겠는가.”

    한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는 건교부의 주택정책에 내 집 없는 서민들의 설움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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