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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치즈와 구더기’

16세기 이탈리아 민중의 삶 속으로…

16세기 이탈리아 민중의 삶 속으로…

16세기 이탈리아 민중의 삶 속으로…
20세기 역사학의 주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독일의 사회사, 프랑스의 아날학파가 주도한 ‘거시사’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진즈부르그 등을 중심으로 ‘국왕들의 위대한 역사’가 아닌 민중의 역사, 나아가 개별 인격체들의 역사를 더듬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것이 오늘날 미시사로 불리는 새로운 역사 방법론이다.

한국에서는 96년 백승종 교수(서강대)와 이해준 교수(공주대)가 ‘미시사적 연구방법’을 놓고 설전을 벌이면서 미시사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지난해에는 곽차섭 교수(부산대)가 미시사 이론, 방법, 논쟁들을 정리한 ‘미시사란 무엇인가’를 펴내면서 미시사 붐을 주도했다.

이론의 도입과 함께 미시사의 대표작 또한 속속 번역되고 있다. 96년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이 가장 빨리 소개되었고, 영화로 먼저 알려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번역에 이어 미시사의 고전이라 할 ‘치즈와 구더기’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이탈리아 동북부 프리올리 지방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메노키오, 본명 도메니코 스칸델라의 이야기다. 그는 1583년 51세에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었다. 메노키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성령이 교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떠들면서 “사제들은 우리들을 자신들의 발 밑에 두려고 하며, 자신들은 즐기면서 우리에게는 침묵을 강요한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펴기도 한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공기,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한 지고지선한 존재는 이들이 하느님과 천사이기를 원하였고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같은 시간대에 그 큰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신도 있었지요. 그는 네 명의 부하, 다시 말해 루시퍼,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과 함께 주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교황청에까지 알려진 ‘치즈와 구더기’론에 이어 메노키오는 예수에 대해서도 불경스러운 입을 놀렸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녀들 중 한 명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도 나머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이 그렇듯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더 숭고한 위험을 갖추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는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한 그의 발언은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히 이단이었다. 그런데도 메노키오는 그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권력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제 생각에 라틴어로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소송 때 가난한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몰라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몇 마디라도 하고 싶으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합니다.”

메노키오는 종교와 사회계층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토론하기를 즐겼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현란한 수사를 과시하려는 인물이었다. 그 결과 고발과 투옥, 고문과 방면이 되풀이되다 끝내 1599년 말 화형에 처해졌다.

메노키오는 평범한 농부도 아니고 전형적인 귀족도 아닌, 민중문화와 상층문화의 경계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종교재판에 불과한 메노키오 이야기를 진즈부르그는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을 재추적했다. 진즈부르그는 주변적이고 무관해 보이는 세부적 특징들에서 전체 구조체와의 연관을 추론해 내는 ‘실마리 찾기’ 방식을 채택했다. 메노키오의 신분과 재산, 그의 친구들, 대화 내용, 종교재판에서의 심문 및 관련자의 증언을 꼼꼼히 모아갔다. 이것들을 퍼즐조각처럼 맞춰가다 보면 16세기 이탈리아의 사회, 특히 민중의 삶이 자연스럽게 복원된다는 것이다.

‘치즈와 구더기’는 미시사 및 미시사 방법론에서 선구적 업적이자 교과서 같은 책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술 방법은 소설에 버금갈 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장점이다. 조금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 촌로와 어떻게든 그를 이단으로 잡아넣으려는 재판관 사이에 벌어진 법정공방은 한 편의 드라마에 가깝다. 16세기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방앗간 주인의 삶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읽는다.

치즈와 구더기/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김정하, 유제분 옮김/ 364쪽/ 1만5000원





주간동아 2001.12.20 314호 (p84~85)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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