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0

2001.11.22

아이들을 얼마나 더 골탕먹일 텐가

널뛰기 수능에 ‘실험대상’으로 전락한 교육개혁 … ‘인생 결정 시험’ 되풀이 이젠 끝내야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4-11-23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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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얼마나 더 골탕먹일 텐가
    2002 대입 수능시험이 끝난 뒤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수능보다 20~40점 떨어질 것이라고 한 예측보다 하락폭이 훨씬 크자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교육부 사이버소리함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홈페이지는 폭주한 항의메일로 접속 불능이었고, 이해찬 의원의 개인 홈페이지도 ‘이해찬의 아이들’로 불린 수험생들의 메일폭탄으로 멈춰버렸다.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난 여름 어느 고교에서 열린 2002 대입 설명회. 500여명의 고3 수험생을 앞에 두고 연단에 오른 입시학원 관계자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은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소위 이해찬 1세대로서…” 그러자 한 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볼멘소리로 “우리가 공부 못한다는 거 다 압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따졌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강사는 “학력이 떨어졌든 올라갔든 대학 가는 데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끼리 경쟁이니까요. 흔들리지 말고 수험 준비에 매진해 주십시오”라며 아이들을 달랬다. 잔뜩 불만에 찼던 표정들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한 수험생 학부모는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도대체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83년생들은 초등학교 6년 내내,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늘 교사들로부터 똑똑한 학년이라고 칭찬받아 왔다. 그런데 왜 고등학교에 가서 바보 소리를 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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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간에서 ‘이해찬 1세대’라 부르는 고3 수험생들은 대부분 1983년생들이다. 그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98년 10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은 ‘2002 무시험전형’ ‘교육비전2002 새 학교문화 창조’ ‘교원 정년 단축’ 등 일련의 굵직한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대폭 바뀐 대입전형의 요지는 암기 위주의 학습과 지나친 학력 위주의 경쟁을 지양하고 다양한 품성과 인성, 소질과 적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대학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뒷받침한 것이 다양한 체험학습, 수행평가 등을 내용으로 한 ‘새 학교문화 창조’안이다. 새 정부의 입시정책은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로 압축되어 학교 현장으로 전파되었다.

    초·중등교육을 정상화하고 사교육비를 절감하겠다는 정부의 교육개혁 의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들이 주장한 “원칙은 찬성하나 현실 적용은 아직 무리다”는 말에 좀더 귀기울였어야 했다. 실제 ‘새 학교문화 창조’안이 실행된 후 학교에는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우선 강제적인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이 폐지됨으로써 자정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고등학교가 오후 4~5시경이면 텅 비었다. 잦은 시험으로 인한 중압감을 덜어주기 위해 학교에서 치르는 수능 모의고사 횟수를 제한하다가 올해부터 아예 금지했다. 아이들은 학력 위주의 경쟁에서 자유로워진 듯 보였다.

    게다가 지난 3년간 수능시험은 지나칠 만큼 쉬워 상위권 학생들조차 심화학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에 쉬운 문제를 실수하지 않고 푸는 요령을 익히는 데 매달렸다. 사실 고2 수준에서도 충분히 풀 수 있었던 2001년 수능시험의 경우 당락을 결정지은 것은 누가 실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수하지 않느냐였다.

    수능만 쉬워진 게 아니라 학교에서 보는 중간·기말고사도 ‘물시험’이었다. 2002학년도 입시부터 고교 내신이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뀌자 각 학교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하나 되어 ‘성적 부풀리기’에 나섰다. 시험문제를 조금만 까다롭게 내도 “대학 가는 데 지장이 있다”며 학부모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고3 담임을 맡고 있는 서울 Y고 유모 교사(물리)는 “배운 범위만큼 시험을 보는 게 원칙 아닌가. 그런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마다 범위가 너무 넓어 공부하기 힘들다는 불평이 쏟아진다. 교장도 은근히 범위를 줄이라고 하니 난감하다. 어차피 수능은 교과서 전체에서 나오는 건데 학교시험은 그냥 내신용으로만 생각하니 학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공부가 되는 좋은 문제보다 내신성적에 유리한 쉬운 문제만 선호했던 결과가 2002년 수능 소동이다. 예상 외로 어려워진 수능 때문에 수험생들은 미지근한 물에서 헤엄치다 갑자기 뜨거운 물에 던져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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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성 전 구정고 교장은 ‘2002년 무시험 대입전형 과연 안전한가’라는 글에서 애초부터 무시험전형의 도입 목적 중 하나인 사교육비 절감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새 입학 제도에서 한 과목만 잘해도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느니 무시험전형이니 해서, 지금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마음이 들떠 있어 교실붕괴 현상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탈(脫)교과의 수능시험, 교과 중심의 학생생활기록부, 특기 중심의 특별전형으로 과외가 오히려 다양해지고 있다. 국·영·수 위주의 소품종 대량 과외에서 교과·특기·논술 등 다품종 소량 과외의 형태로 바뀔 뿐이다. 내신과외·수능과외·특기과외·논술과외로 학원만 살판나게 되었다.” 애초 98년 무시험전형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교육계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시험과는 거리가 먼 데도 마치 무시험인 것처럼 호도했기 때문이다. 98년 교육부가 이 입시 개선안을 처음 여당에 보고하자 한 의원이 당시 이해찬 장관에게 “무시험전형이라는 용어가 교육참여자들에게 오해를 낳고, 학생들은 시험 자체를 안 보고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비교육적 발상”이라며 차라리 “대입전형방법의 다양화라고 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건의했으나 이 전 장관은 ‘무시험전형’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그 말에서 뭔가 개혁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기 때문에 정치적 수사로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한때 서울시교육청 장학사까지도 “무시험이니까 수능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로 이 용어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해찬 전 장관 입장에서 이번 수능의 난이도 조절 실패와 관련해 비난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지만, 2002년 새로운 입시제도를 굳이 ‘무시험전형’이라 해서 생긴 학교현장의 혼란에 대해서만큼은 책임을 면키 어렵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간다”는 미몽에서 깨어난 지 오래다. 학교에서의 특기·적성교육 시간도 슬그머니 입시과목 보충수업으로 바뀌었다. 지난 4월 교육부가 전국 95개 고교의 특기·적성교육 현황을 파악했을 때 이미 80%가 방과후 보충수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입시제도에 대해 처음부터 제대로 알려야 했다. 성적 위주의 한 줄 세우기에서 특기·적성에 따른 여러 줄 세우기로 바꾸어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정책이다. 하지만 줄도 줄 나름이다. 아직까지 공부로 대학 가는 줄은 넓고 길다. 특기나 적성으로 가는 줄은 한두 명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2002년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공부 안 해도 대학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분노하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이영덕 대성학원 평가관리실장)

    이번 수능 소동으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이해찬 의원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문제가 어려우면 학생들의 성적은 함께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이의원의 말대로 문제가 어려워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에 왜 수험생과 가족들은 승복하지 않는 것일까.

    올해 새 학년 1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002학년도 수능을 평균 36점까지 떨어지도록 난이도를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물수능’을 만회하겠다는 의지였지만 이번에는 고3 수험생들의 학력 저하가 문제 되었다. 당장 재수생과 비교해 2002 수능에서 크게 불리하다는 소문이 돌자 고3 교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고3 학력붕괴’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 것도 이 무렵부터다.

    6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비공식적으로 입시학원 평가담당자들을 소집했다. 3년째 쉬운 수능으로 고교생의 학력 저하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각 입시학원이 내놓은 모의고사 결과들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입시학원 관계자들은 “현재 고3 학력이 재수생에 비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너무 쉬워 문제가 됐던 2001년 수준으로 난이도를 맞춘다 해도 평균점수는 지난해보다 떨어진다”고 했다. 또 “만약 2000년 입시 수준으로 출제하면 수험생들의 체감 난이도는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평가원의 김성동 원장은 수능시험이 임박한 지난 10월, “6월에 실시한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재학생들의 성적이 예상보다 좋게 나왔기 때문에 학력 저하 문제를 약간은 고려하되 큰 비중을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001학년보다 어렵고 2000학년보다는 조금 쉽게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입시학원 관계자들의 충고가 맞았다. 올 수능은 작년보다 조금 어려운 게 아니라 크게 어려웠고 2000학년보다도 까다로웠다. 정부기관이 사설 입시기관보다 수험생의 학력 수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 결과적으로 이번 수능에서 재수생들의 점수 낙폭이 재학생보다 적어(최상위권 20점, 상위권 30점) 재수생 강세가 예상되면서, 올 초 난이도를 높인다고 했을 때 일어났던 우려도 적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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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따른 난이도 조절 실패로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린 부분에 대해 평가원측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수능 난이도가 문제가 되자 다음날 곧바로 “출제과정에 고교 교사를 대거 참여시키고 평가원 내 수능 상설기구를 설치해 난이도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대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할 수 있다면 왜 진작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올해 수능 파문으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 온 교육개혁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고교교육정상화를 위해 대학입시에서 수능의 비중을 낮춰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쉬운 수능’ 체제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서울대 등 소위 일류대학들이 “수능이 너무 쉬워 변별력이 없다 보니 성적 우수학생들이 오히려 손해를 본다”거나 “대학 신입생들의 학력 저하가 심각하다”는 불평을 계속하면서 ‘쉬운 수능’의 소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대학들이 ‘쉬운 수능’ 대신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부활을 요구하자 차라리 ‘변별력’을 내주고 말았다. 상위권 대학에서 그토록 원했던 수능 변별력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수능성적이 당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교조 학생생활연구소 김경욱 사무국장(단국대 부고 교사)은 변별력과 학력의 관계를 부인한다. “일부 대학들의 편의에 의해 학력 저하 논쟁이 벌어졌다. 시험의 변별력을 높이면 학력이 높아지는가. 시험의 형태에 따라 학생들의 학력이 하루아침에 높아졌다 낮아지는 게 아니다. 학력 저하는 본고사가 사라진 후 매년 반복되는 이야기다. 대학이 정말 원하는 것은 본고사 부활 아닌가. 요즘 아이들의 학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았는지 묻고 싶다. 부모 세대가 학교에 다닐 때보다 훨씬 심화된 학습을 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교육개혁안 마련에 깊숙이 관여했던 교육부 관계자도 “지금의 혼란은 교육개혁의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니라 현장에서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95년 5·31 교육개혁 때부터 지식인들은 입만 열면 언제까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할 거냐, 21세기에는 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입시제도가 바로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였다. 과거보다 문제 푸는 연습을 덜 하고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전학년도에 비해 시험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물론 이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깊은 사고력이나 창의력이 생겼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 결과는 수십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98년 10월 ‘교육비전 2002 새 학교문화 창조’안이 발표된 직후 기자는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과의 인터뷰에서 “교육부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이 전 장관은 “교육부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어물어물하다 또 1년이 지나면 실행시기도 99년 말로 늦춰질 것이고 그때 되면 정치권에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고 답했다. 이 전 장관은 문민정부 시절 초안을 마련한 이 개혁안이 실행도 못해보고 또다시 안으로만 끝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탓인가. 국민의 정부 교육개혁은 앞뒤가 바뀐 채 진행되거나, 여론에 밀려 수정되기 일쑤였다. 2002년 수능 소동도 난이도 조절 실패를 떠나, 이 정부의 교육개혁 취지와 방향을 국민이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 아닐까.

    2005년에는 입시제도가 또 바뀐다. 얼마나 많은 혼란이 계속될 것인가. 학부모들은 벌써부터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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