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8

2001.11.08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1-18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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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이환경 작가요? 산속으로 들어가셨어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안 내려오시겠대요.”

    KBS ‘태조 왕건’ 제작팀의 한 관계자는 작가 이환경씨(51)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신문에는 “전속계약을 맺은 이환경씨가 당초 100회까지만 ‘태조 왕건’을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집필중이며 속편격인 ‘제국의 아침’까지 쓰기로 했다”며 SBS프로덕션이 ‘태조 왕건’에 대한 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이환경씨는 SBS프로덕션과의 계약 때문에 내년 3월 방송될 ‘야인시대’의 원고를 써야 한다. 그러나 애초 100회 정도를 예상한 ‘태조 왕건’이 200회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고, 이 프로의 후속격인 ‘제국의 아침’까지 연이어 쓰기로 구두계약이 되어 있어, 이대로 가다간 한 작가가 동시에 세 편의 드라마를 쓰는, 방송가에 유례 없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는 판국이다. ‘야인시대’ 조연출 장형일씨는 “작가가 없는 상황에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초고 형식이지만 이환경씨가 쓴 대본도 몇 회분이 이미 나와 있다. 오래 전에 체결된 계약이고, 몇 번씩 밀린 프로젝트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물도 아니고, 사극을 두세 편이나 동시에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답답한 건 KBS측도 마찬가지. 모르는 사람들은 “작가가 그렇게 없느냐”고 묻겠지만 그것도 일면 사실이다.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안방극장에 불어닥친 전례 없는 사극 열풍으로 사극 작가에 대한 수요는 크게 늘어났지만 이를 감당할 만한 작가층은 고작 5~6명 선을 넘지 못한다. 현재 활동중인 방송작가 가운데 사극 집필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은 ‘용의 눈물’ ‘태조 왕건’의 이환경씨를 비롯해 ‘왕과 비’ ‘명성황후’의 정하연씨(57), ‘미망’ ‘홍국영’의 임충씨(63), ‘허준’ ‘상도’의 최완규씨(37), ‘임꺽정’ ‘여인천하’의 유동윤씨(37) 정도가 고작이다. 이 밖에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집필한 사극 1세대 작가 신봉승씨(68)가 원로로 꼽힌다. 그는 현재 역사소설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다른 장르와 달리 수요과 공급의 불균형이 심한 현상에 대해 한 방송관계자는 “현대극과 달리 각 시대의 언어, 풍속 및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고증과 이해가 전제돼야 하므로 작가들이 쉽사리 달려들지 못한다. 방송사 입장에서도 “사운을 건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작품들인 만큼 능력이 보장된 작가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사극은 지속적인 공부가 필요한 장르다. 오랜 세월 책을 읽고, 생각하고, 쌓인 경험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 사극을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영화 시나리오, 라디오 작가, 멜로드라마 작가를 거쳐 사극에 정착한 정하연씨는 “나이 들어 사랑타령하기도 그렇고 해서 사극을 시작했는데, 현대극 쓸 때와 비교도 안 되게 힘들다. 사극 쓰는 동안에는 일주일 내내 집필에 매달려야 한다. 자료를 봐도 금세 잊어버리니 시간도 배로 들고 늘 앉아서 글만 쓰느라 체중도 많이 늘었다”고 말한다.

    부족한 사료도 사극작가들을 괴롭히는 한 요소. 이환경씨는 TV 사극 최초로 고려시대를 다룬 ‘태조 왕건’을 쓰면서 ‘고려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역사적 사료가 없어 중국 옌볜까지 가서 자료를 구했다. “기존 사료만으로 대본을 쓰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 사극작가들의 한결같은 푸념. 궁예의 죽음은 사서(史書)에 단 한 줄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고, ‘여인천하’의 정난정 역시 실제 인물이긴 하나 그녀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딱 두 줄 언급돼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온전히 작가가 상상력에 의존해 창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허구’의 문제가 학계와 사극작가간의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대두된다. ‘사극=사실’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시청자들의 뿌리 깊은 인식도 사극작가들을 괴롭힌다.

    “시청률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역사드라마는 결국 ‘픽션’입니다. 드라마가 역사를 보여주진 않아요. 역사적 의미와 시대의식을 담을 뿐이지요.”(신봉승씨) 사극작가들은 “드라마를 역사책과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지만, 시청자들이 딱딱한 역사책을 읽기보다 드라마로 꾸며진 역사를 택하는 현 상황에서 사극 역시 올바른 역사 인식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높다.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소재, 한정된 작가층으로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인식되던 TV 사극은 지금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최근 들어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사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방송제작자 역시 새로운 작가를 과감하게 기용해 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30대 사극작가 최완규·유동윤씨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본보기다(상자기사 참조).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상화 이사는 “사극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으면서 더 많은 작가들이 사극 집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궁중사극의 경우에도 여성작가들이 훨씬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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