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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환자가 주인인 ‘의료생협’ 대안의료로 각광 … 조합원이 직접 참여하는 ‘건강공동체’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할머니, 이 약은 드시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삼십만 원이나 들여 사온 약인데, 왜?”

“할머니는 빈혈이 아닌데 의사 처방 없이 빈혈약을 이렇게 함부로 드시면 안 되죠.”

“그래? 우리 예쁜 의사 선생이 하는 말인데 들어야지. 약 무르지 뭐.”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김인아 할머니(가명·80)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이처럼 자신을 찾는 의사와의 대화가 여간 살갑지 않다. 김씨는 지난 20년간 앓아 온 중풍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지만 지난해 서울에서 이곳 부평으로 이사 온 후로는 더 이상 휠체어에 의지해 병원을 찾지 않는다. 현금 3만 원(1계좌)을 자신의 집 인근에 있는 인천 평화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에 출자한 후 이 조합이 운영하는 평화의원과 평화한의원의 ‘주인’이 됐기 때문.

이 조합은 거동이 불편한 조합원에 대해 방문진료를 하도록 한 조합 결의에 따라 5년 전부터 방문진료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김씨는 방문진료를 받으면서도 미안함이나 어색함이 없다. 자신이 낸 출자금과 진료비로 병원이 운영되고, 그 때문에 월급을 받는 의사가 방문진료를 오니 오히려 의사가 막내딸처럼 여겨지고, 의사를 도와줄 방법이 없나 스스로 찾게 된다는 것. 조합이 잘 돼야 자신의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주인의식이 어느덧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평화의료생협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인천시 부개동과 그 인근 지역에서는 꽤 유명하다. 병원 경영에서부터 지역 주민의 건강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건강과 의료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주민이 직접 참여해 해결하고 있기 때문. 의료 소비자인 주민이 자신들이 낸 출자금으로 병원을 세우고, 보건 프로그램에 참가해 자신과 이웃의 건강을 돌본다는 점에서 재야 의료계는 평화의료생협을 하나의 ‘건강공동체’로 평가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정식으로 법인이 설립된 의료생협은 평화의료생협을 비롯해 안산의료생협과 안성의료생협 등 3곳뿐. 하지만 관련법 미비로 임의단체로 활동하다 지난해 3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개정된 후 정식 법인화 작업을 마친 의료생협은 이제 재야뿐 아니라 시민단체로부터도 상업성에 찌든 의료인 중심의 기존 의료관행을 벗어나기 위한 대안의료 시스템과 대안병원의 한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의료인이 소위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던 의료를 반성하며, 주민과 의료인이 함께 참여하여 인간다운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신장시킨다. 환자는 더 이상 고장난 기계가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간직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것이며,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건강을 유지·증진시킬 보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이익이나 건강에 국한하지 않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상호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천평화의료생협의 정관 전문에서 보듯이 의료생협을 이끌어가는 두 축은 대안병원과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보건복지 프로그램이다. 중풍 환자 김씨가 정기적으로 방문진료 서비스를 받는 평화의원과 평화한의원도 평화의료생협의 조합원이 출자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의원들. 이곳에 근무하는 두 명의 양의사와 한 명의 한의사도 조합원이 고용한 월급쟁이 의사이자 생협 조합원이다. 그러니 이 의원들에서만큼은 중복투약, 진료일수 늘리기 같은 과잉진료가 구조적으로 있을 이유가 없다. 약물 오남용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의사에게 이윤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월10일 평화의원에서 만난 한 조합원은 “조합원과 의사는 한가족이기 때문에 격의가 없고, 의사 선생님이 친조카 대하듯, 어머니 대하듯 대해 주니 서로 부담감이 없다. 좀 오래 기다리는 게 흠이지만 미리 예약해 두면 이런 일도 없다”고 말한다.

환자와 의사가 모두 병원의 조합원이자 주인이다 보니 의사들이 친절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불친절과 권위적인 의료관행에 길들여진 일반 환자들에게는 이곳 의사들의 친절함이 ‘밀려오는 감동’ 그 자체다. 지난 97년 조합원이 된 조태옥씨는 “다른 의원에 갔다 나오면 항상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의사를 믿을 수 있어 좋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시간에 관계없이 끝까지 들어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조씨는 조합원이 된 후 좋아진 점 중 하나가 건강검진을 자유롭게 받을 수 있고, 예방접종도 싸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평화생협은 한 계좌당 출자금액 3만 원을 내고 조합원이 되면 그 가족 전체에게 조합원 자격을 준다. 조합원은 무료로 성인병을 비롯한 정기검진을 받을 수 있고, 출자자 본인에 한해 일반 병원의 절반 가격으로 종합검진을 받을 수 있다. 예방접종도 20% 이상 싸다. 모든 것이 실비 수준. 그 밖에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 대한 방문진료는 물론, 한약재 가격도 조합원의 경우 할인해 준다. 또 병원 수익금은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조합원에게 돌아간다.

친절과 다양한 의료서비스 덕분일까. 평화생협은 매년 회원이 꾸준히 늘고 있다. 법인화 이후 400여 명이던 조합원이 520명으로 늘었다. 96년 임의단체 시절의 127명에 비하면 4배 가량 증가한 수치다. 적자를 면하지 못한 수익구조도 지난해 차입금을 갚고 1200여만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생협 관계자의 자체 분석은 많이 다르다. 기대치보다 회원이 늘지 않은 데다 회원 증가가 생협 활동의 활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평화의원 조계성 원장(여·37)은 “의원을 찾는 환자의 비중이 조합원의 경우 아직 20%에 불과하고, 조합원이 늘었다고 하지만 실제 조합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조합활동의 성패는 의료서비스가 아니라 조합원이 얼마만큼 주인의식을 가지고 각종 프로그램과 공동체사업에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시설과 홍보비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올해는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생협 이사이기도 한 조원장의 이런 지적으로도 평화생협 조합원들의 활동은 눈여겨볼 만하다.

“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지난 10월10일 오후 3시 평화생협 3층 강당. 일단의 할머니들이 흥겨운 댄스 음악에 맞춰 건강체조를 하고 있다. 생협의 소모임 중 하나인 체조모임 회원들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할머니들의 생협 자랑은 끝이 없다. 정계연씨(58)는 “건강체조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숨이 차서 계단도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등산도 거뜬히 한다. 요즘은 하루라도 거르면 몸이 개운치 않다”고 건강미를 과시한다. 서계순 할머니(61)도 “동네 사람들 얼굴 알게 돼 좋고, 한 번씩 혈압과 당뇨 검사를 하니 건강체크도 되고 일거양득이죠”라면서 ‘한병원 한식구’임을 강조한다.

특히 조합원들의 소모임 중 ‘무지개 모임’은 의료생협이 추구하는 건강 자치활동의 전형을 보여준다. ‘무지개 모임’ 회원들은 모두 생협이 주관하는 보건학교를 졸업한 ‘아줌마 건강 도우미’들. 조합원인 이들은 매주 화요일마다 인천시 부개동과 일신동, 삼산동, 갈산동 등 인근 지역 조합원 환자들에 대한 가정방문 봉사활동과 거리 무료봉사 검진을 벌인다. 이 모임의 윤정화씨는 “보건학교에서 배운 대로 혈압과 혈당을 체크하고, 투약지도를 하면서 건강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반가워하는 독거노인을 보고 생협 활동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운동을 시키면서 의료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있었다.

“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인천평화생협이 오랜 경험으로 이제 본궤도에 오른 경우라면, 경기도 안산시 월피동을 중심으로 한 안산의료생협은 이제 막 도약기를 맞은 생협이다. 안산의료생협도 평화의료생협이 진행하는 대부분의 사업을 하고 있거나 시작하려고 준비중인 상태. 하지만 조합원 숫자만큼은 지난해 7월 법인 창립 후 벌써 700명을 넘었다. 조합원 1계좌당 출자금액을 1만 원으로 낮게 책정한 것이 조합원 모집의 유인책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1만 원을 내고 조합원이 되면 안산생협에서 운영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고, 다양한 의료서비스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가는 게 즐거워요”
안산생협이 계좌당 출자금액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생협 부설 새안산의원 이재광 원장이 자신이 경영하는 개인의원을 정리하면서 의료기구와 시설을 조합에 전액 현물 출자함으로써 가능했다. 이원장은 “생협의 고용 의사가 된 후 환자를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게 돼 너무 기쁘다. 생협 운동은 의사와 환자간에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세금 떼고도 월급이 400만 원이 넘으니 그리 적은 수입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안산생협이 단기간에 조합원을 많이 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생협 부설 새안산의원과 한의원이 밤 시간과 공휴일에도 진료한다는 점이다. 이 생협에 매달 10만 원씩 출자하는 하용주씨는 “퇴근 후나 공휴일밖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샐러리맨을 위해 밤과 공휴일까지 진료하면서도 의사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환자를 한결같이 대하는 모습을 보고 매달 출자금을 늘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8월 의료파업 때문에 병원을 전전하다 새안산의원을 처음 찾았죠. 의료단체의 갖은 압박 속에서 진료를 하는 것도 고마운데, 선생님이 자신의 진료과목이 아니라면서 책을 찾아가며 진지하게 진료해 주신 게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안산생협 조합원 이응표씨는 의료생협에 가입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요즘 이 생협의 ‘소전사’(소식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활동에 참여하는 열렬한 조합원이 되었다.

“의원의 주인인 의료생협과 생협의 주인인 조합원의 휴진 결정이 없는데 어떻게 의사가 독단적으로 진료를 중단할 수 있습니까?” 안산생협 이원장의 말 속에서 대안의료의 희망의 싹을 엿볼 수 있었다.





주간동아 307호 (p36~38)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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