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3

2001.09.27

‘善 과 惡’ 그 비극의 이분법

설 자리 엷어지는 신중론 … 미국과 ‘그들의 문제’, 갈등 해결은 요원한 숙제

  • < 이흥환/ 미 KISON 연구원 >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12-23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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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과 워싱턴 두 도시가 세 대의 민간 항공기에 의한 자살테러 공격을 받은 지 5일째 되는 날인 지난 9월16일 일요일,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부 네 명이 약속이나 한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텔레비전 화면에 나왔다.

    부시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보팀과 주말을 보내고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체니 부통령은 화요일의 대참사 이후 이날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의 일요일 아침 토크쇼에 출연해 인터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실질적 전쟁 선포를 한 뒤였다.

    시간과 장소만 달랐을 뿐 이날 네 명의 발언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꼭 이길 것’이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세 가지였다. 말(외교)은 필요 없고 (군사)행동만 남았으며, 재고의 여지도 없고, 뒤로 물러설 곳도 없다는 것이다. 파월 국무장관은 미국이 법률로 정한 암살 금지 규정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핵 무기도 사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간접적이긴 하지만 사용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또 이날 처음으로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입에서는 미국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내놓는 미국식 출사표, 즉 선과 악의 이분법이 선보였다.

    애완견 두 마리를 앞세우고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인 해병대 1호기에서 내린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남쪽 잔디밭 앞에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 서서 쏟아지는 질문에 20여 분 동안 대답하는 동안 ‘악인들’(evil-doers)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썼다. 이날 오전 토크쇼에서 체니 부통령이 테러리스트들을 ‘나쁜 자들’(bad guys)이라고 한 뒤에 나온 말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 때 걸프전, 클린턴 행정부 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공습, 코소보·소말리아·레바논 등 미국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바로 이 선과 악의 구분이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토록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을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계속해서는 곤란하다는 신중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 최고위 정책 결정자 네 명의 발언으로 봐서는 신중론이 설 자리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

    부시 행정부는 이제 출범한 지 8개월째다. 8개월 동안 부시 행정부가 보인 외교정책은 일방주의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반요격 미사일(ABM) 협정, 포괄적 핵실험금지 협정, 교토 지구온난화 의정서 등 굵직굵직한 양자·다자간 국제협약에 등을 돌렸다.

    국가미사일 방어도 유럽 러시아 중국이 거세게 반대하였는데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난 9월11일 테러 참사 이후에도, 테러 예방이 우선이지 미사일 방어가 국가안보의 최우선책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부시 행정부는 오불관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백악관 참모도 미사일 방어에 관한 한 뒤로 한발짝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럼스펠드 장관도 마찬가지며, 체니 부통령 또한 ‘나쁜 자들’ 발언을 한 지난 9월16일의 일요일 인터뷰에서도 미사일 방어계획은 변동 없다고 쐐기를 박아버렸다.

    8년 만에 백악관 주인을 다시 만든 공화당 정권은 보수의 보루를 되찾았고 강경의 깃발을 꽂으면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강성 미국’호를 발진시켰다. 그리고 출범 8개월 만에 9월11일의 테러 대참사를 겪은 후에는 더욱 단단히 무장하였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정책 결정자 네 명이 핵무기 사용 불사 등 강경 발언을 토한 날,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의 엘리엇 코언 교수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일부 평론가들이 일방주의냐 다자주의냐의 선택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미국은 유엔의 제재가 필요하지도 않고 유엔 제재 같은 것을 모색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번 전쟁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제 미 국민과 의회에 모든 것, 그야말로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정부가 아끼고 말고 할 때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오로지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 외교정책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 중재노력을 하려고 애쓴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그들의 문제’일 뿐 미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50년의 해묵은 분쟁이다. 이슬람 입장에서 보면 피로 얼룩진 50년이라는 긴 시간은 미국의 이스라엘 편애 때문이다. 미국이 해마다 이스라엘에 30억 달러를 지원해 주고, 역시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자기네 땅에 들어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렇게 묻는다. 왜 수많은 이슬람교도는 우리를 적으로 여기는가? 우리를 그렇게 여기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테러리스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남녀, 평범한 이슬람교도에 대한 물음이다.

    브라운 대학의 중동문제 전문가 윌리엄 비먼 교수는 오사마 빈 라덴이 그렇게 지독한 반미 테러리스트는 아니며, 미국이 예루살렘을 포함해 이슬람 성지를 점령한 것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비먼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미국이 그 지역을 떠날 때까지 빈 라덴은 반미 입장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퍼시픽 뉴스 서비스’의 논평에 게재한 이 글을 읽고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래스베리는 이렇게 평했다.

    ‘(다른 서구 국가를 포함해) 미국이 그 지역에 대한 관심을 접고 말끔히 빠져 나와야 한다는 그런 바람이 반미감정 뒤에 있는 이유라면, 또 (이 이유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줄여야 한다는 바람이 반미감정의 이유라면, 그 감정을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대답하기 어렵다’.

    전 세계에 이슬람인은 10억 명이 퍼져 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이 중동에 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외치는 것은 ‘성전’(지하드)이다. 정치나 외교의 문제가 아니다. 이슬람이 ‘선’이기에 성전이고, 적인 미국은 악이다. 미국의 대응 역시 선과 악의 양자 택일이다. 테러리스트들에게 근거지를 제공하는 나라는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최후 통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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