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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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다시 쓰는 ‘의병장 신돌석’

안동대 김희곤 교수 100년 만에 사망 장소 첫 확인… 만주에서 독립운동 꿈꾸다 비통한 최후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1-17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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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로 다시 쓰는 ‘의병장 신돌석’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항일의병 투쟁의 전개’ 부분을 펼치면 신돌석(1878~1908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을사조약 강요 이후에는 규모가 큰 의병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익현 신돌석 등을 들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은 평해·울진·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항일의병 투쟁과정에서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병운동이 신분을 초월한 국권수호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신돌석이다. 그 이상은 산을 탈 때 남들보다 두세 배 정도는 멀리 건너뛰고 영해에서 대구를 한숨에 갔다왔다는 등 축지법과 관련된 민담들이 대부분이다. 신돌석은 흔히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기개를 갖춘 신출귀몰한 ‘태백산 호랑이’로 묘사된다.

    그러나 역사학자는 전설 속의 신돌석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47,사학과)는 100년 전 민중의 우상인 의병대장 신돌석의 본래 모습을 찾아 나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매달린 것은 1995년부터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경북 영덕군이 신돌석 장군의 생가 성역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부족을 실감하고 김교수에게 이 부분의 복원을 의뢰했다.

    그가 역사인물 신돌석의 재조명 작업에 나서자 엇갈린 반응이 나타났다. 보통 사람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외에 더 나올 게 뭐 있느냐”는 반응이었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연구하고 싶어도 자료가 없는데 어떻게 연구하느냐”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실제 신돌석과 관련한 제대로 된 논문 한편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나마 자료들이 모두 흩어져 신돌석 관련 부분을 따로 추려야 했고, 증언들도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과장과 오류가 너무 많았다. 김교수는 당시 재판 판결문과 신문, 일본 토벌대 자료 등을 샅샅이 뒤져 신돌석 관련 부분들을 하나하나 꿰어맞춤으로써 하나의 ‘설’로 전해진 부분을 ‘사실’로 입증하거나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역사로 다시 쓰는 ‘의병장 신돌석’
    김교수는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선 그가 숨을 거둔 장소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김씨 형제가 일본이 내건 “신장군을 잡는 자가 있으면 천근의 금과 만호의 고을을 준다”는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약 탄 술(또는 독한 술)을 먹인 뒤 타살했다는 것이다(일본측 기록은 이와 조금 다르나 김씨 형제가 살해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막상 숨진 장소에 대해서는 “마을(영덕군 북면 눌곡마을) 앞 100여 보 거리의 눈이 얼어붙은 개천 위다” “피를 흘리며 뛰쳐나가 언덕에 떨어졌는데 약 200m 가까이 걸어나갔다가 널찍한 붉은 돌에 자빠져 죽었다” “댓 길 정도 너른 청석이다”는 등 붉은 돌과 푸른 돌을 왔다갔다할 만큼 증언과 기록이 엇갈렸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현장확인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정확한 장소를 찾으려면 마을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으나, 그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민중의 영웅인 의병장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죽었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마을 전체가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김희곤 교수는 “살해범과 같은 문중이거나 한마을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들도 역사의 피해자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난해 12월12일 신장군의 제삿날, 김교수는 생가 부근에 지어진 사당에서 제를 올린 후 곧바로 눌곡마을을 지나 얼어붙은 황곡을 올랐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한 마을 주민이 좀더 계곡을 타고 가면 옛 집터가 나온다고 넌지시 알려준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옛 집터에서부터 다시 좁은 계곡을 따라 300m 가량 내려와 두 사람이 누울 정도로 반듯한 청색 암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암반의 표면은 상류에서 흘러 내린 물질로 인해 붉게 변해 있었다. 엇갈린 증언 즉 푸른 바위, 붉은 바위가 모두 사실인 것이었다. 이로써 최초로 신돌석이 죽은 장소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신돌석의 30년 생애 가운데 의병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1906년 4월부터 순국할 때까지의 2년8개월 간이다. 이때 신돌석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오르내리며 항쟁을 펼쳤고, 그가 죽은 후에도 잔여세력이 1909년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인 항쟁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영웅담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부풀린 측면도 있다. 특히 항일의병활동 범위에 대해 강원도 양구나 경기도 양평 또는 청평까지 진출했다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고 김교수는 말한다. 의병들은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게 원칙이었고, 당시 기록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의병 활동지는 남쪽으로 영덕과 포항 및 경주 접경지, 북으로 강원도 삼척 남부, 서쪽으로 일월산에서 영양을 거쳐 청송을 잇는 선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역사로 다시 쓰는 ‘의병장 신돌석’
    또 국사 교과서에서 그를 따르는 의병 수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 되어 있으나 김교수는 당시 의병의 보급능력 등을 고려할 때 300명 규모로 보는 게 가장 적당하다고 말한다. 광복 직후 기록된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을 보면 신돌석 휘하의 의병 수가 3만 명에 이른다는 어처구니없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한말 군대의 10배나 되는 숫자이며 영해·영덕 지역 인구보다 많은 것이었으니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처럼 신돌석에 관한 자료는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 많아 오히려 신돌석을 재조명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편 신돌석이 비록 평민 출신이었지만 양반계급과 민중에게서 동시에 폭 넓은 지지와 신망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의병항쟁 과정에서 많은 양반들이 재산을 빼앗기거나 폭행당하는 등 고통을 겪자 의병에 대한 원성도 자자했다. 하지만 신돌석에 대한 원망은 한마디도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군의 눈을 피해 신돌석을 지원하려는 양반들이 많았다.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은 신돌석과 김상태 의진의 기지 건설을 위해 1만5000금의 거금을 지원했다가 검거되었고, 퇴계 종가는 1907년 신돌석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불태워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신돌석 휘하에는 양반계급 출신들이 상당수 끼여 있었다. 중견간부로 활동한 백남수는 한말 주사(군수 바로 아래 직급)를 지낸 고위 관료 출신이었으며, 그밖에도 1908년 의병활동 말기에 일본군에 투항한 명단을 보면 사족·유생·동몽·양반 등의 계급이 적힌 이름이 여러 명 확인되었다.

    1908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일본 토벌대의 집요한 추격으로 의병대가 버티기 힘든 처지에 놓이자 신돌석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한편, 자신은 만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사실은 신돌석 스승의 아들이며 동문수학한 이병국이 신돌석이 죽은 후 쓴 ‘만사’(輓詞)에서 드러난다. 만사에는 “어느 날 밤 그대가 찾아와 나에게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 여러 강국에게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고 말했다”고 씌어 있다. 당시 ‘서쪽’은 곧 만주를 의미했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하려던 신돌석의 계획은 동족의 손에 죽음으로써 허망하게 끝맺는다.

    김희곤 교수는 신돌석의 신화를 벗기는 작업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존재를 현실로 끌어냄으로써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유림지배계급의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의 탄생은, 굳어진 중세적 계급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 개념의 신분제를 향한 발전을 뜻한다. 신돌석은 3년이라는 짧은 의병활동으로 한국역사의 발전과정을 증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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