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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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사는 생생한 고급영어

  • < 정철/정철언어연구소 소장 www.jungchul.com >

    입력2005-01-05 15: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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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부터 영화에 미쳐 공부하던 필자의 옛날 얘기를 하고 있다. 미국영화를 알아들어 보려 고생고생한 끝에 ‘Waterloo Bridge’(애수)의 영화대본을 얻게 된 얘기부터 계속한다. 그냥 영화를 볼 때는 하도 반복해 봐서 그저 그렇게 느껴진 영화가,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상에 이렇게 슬프고 아름다운 말들이 또 있을까. 내가 그토록 알고 싶어 애쓰던 그 흐릿한 부분들이 새까만 활자로 또렷이 적혀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과 절망과 비탄이 전율처럼 내 등줄기를 타고 오르내렸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나는 거의 두문불출하고 대본을 거의 다 외워버렸다. 아니 외웠다기보다는 외워졌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극장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수없이 계속 들으며 그 영화 속의 배우와 똑같이 할 수 있을 때까지 큰 소리로 읽고 또 읽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녹음기를 틀어놓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한 달 가량 연습하고 나니, 나중에는 대본을 보지 않고도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혼자 공연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후로 몇 년간 근 100편 가까운 영화를 공부했는데, 그 중에서도 10편 가량의 좋은 영화들은 대본을 보지 않고도 영화에서 실제로 나오는 소리와 거의 똑같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했다.



    이렇게 영화에 미쳐 지내다 보니 꿈 속에서까지 영어로 말하는 일이 많았다. ‘비비안 리’를 가운데 놓고 ‘로버트 테일러’와 함께 삼각관계가 되어 심각하게 다투기도 하고, ‘찰턴 헤스턴’과 함께 벤허 속에 들어가 신나는 모험을 하기도 하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감미로운 데이트를 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물론 영어로 말이다.

    평범한 미국인보다는 주로 비비안 리, 로버트 테일러, 리처드 버튼, 리즈 테일러, 시드니 포와티에, 그레타 가르보, 게리 쿠퍼 등 세기의 명배우들과 사랑을 속삭이고, 싸우고, 협상하면서 생생한 고급영어를 배웠다. 이렇게 하고 나니, 나중에 실제로 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을 때 거의 막히는 것 없이 대화할 수 있었고, 또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도 거의 불편한 것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영화의 대사란 것이, 물론 좋은 영화일 경우지만, 원작자가 쓴 것을 시나리오 작가가 다시 영화에 맞게 다듬고 또 그것을 배우가 장면에 맞게 완전히 소화해서 감독의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촬영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감정·억양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

    게다가 영화의 속성상 내용이 재미없으면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므로 무조건 재미있게 만들도록 되어 있어 한번 외운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 영화 ‘哀愁’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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