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1

2001.07.05

한국 속 이국적 삶 ‘대덕 아줌마들 24시’

대전 도룡동 등 해외파 고학력 주부들… 봉사·검소·더치페이 등 ‘물건너 습관’ 그대로

  • < 전원경 / 자유기고가 > winniejeon@yahoo.co.kr

    입력2005-01-04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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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속 이국적 삶 ‘대덕 아줌마들 24시’
    “별다르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요.” 대덕연구단지에 사는 주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사는 모습이 별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과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곳에서의 삶이 왜 특별한지 금세 알 수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곧고 널찍한 도로와 깨끗한 거리가 인상적인 한적한 주택가다. 대덕연구단지 내에 있는 86개 연구소의 직원들은 주로 이곳과 인근 신성동, 그리고 한국과학기술원이 위치한 어은동 등에 거주하고 있다.

    대덕연구단지에서 일하는 연구인력은 모두 1만6000여 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해외에서 거주하다 귀국한 사람이 상당수다. 해외유치 과학자들은 대개 도룡동에 정착한다. 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들을 위한 임대 아파트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등 외국인 과학자 가족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연구단지 내에서도 도룡동 일대의 생활방식이 가장 독특하다.

    석사학위론 명함도 못 내미는 동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부들의 검소한 생활태도다. 연구단지에 사는 주부들은 거리낌없이 남의 옷을 물려 입거나 버려진 가구를 주워 사용한다. 여기서는 바자나 미국에서 ‘차고세일’(Garage Sale)로 불리는 중고품시장이 흔히 열린다. 모임을 열 때는 한 집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만들어오는 포트럭 파티가 일반적이다. 음식점에서 만나도 더치페이가 당연하다. 또 서울처럼 과외에 극성을 부리지 않는 대신, 주부들이 한 과목씩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또 연구단지의 주부들은 외국의 주부들처럼 봉사활동을 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들은 학교의 특활교사, 도서관 사서, 교회에서의 자원봉사 등에 나서고 있다. 특히 영어교육의 경우 웬만한 교사보다 실력이 나은 주부들이 적지 않다.

    친한 듯하지만 묘하게 ‘갠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 역시 연구단지의 특징이다. 대덕연구단지에는 주부들이 흔히 한두 곳은 끼게 마련인 계모임이 없다. 또 산아제한이란 개념이 없는 미국에서처럼 세 명 이상의 자녀를 낳아 기르는 집도 드물지 않다.

    뭐니뭐니해도 대덕연구단지에 사는 연구원 부인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고학력자라는 점일 것이다. 국내 명문대 학벌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직장에 다니던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학력을 이곳에서는 쓸 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길거리에 널린 게 박사’인 대덕연구단지의 특성상 석사학위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심지어 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육석사과정(TESOL) 수료자조차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 속 이국적 삶 ‘대덕 아줌마들 24시’
    “대전에는 연구소 외에 취직할 곳이 거의 없어요. 자연계나 공학계열을 전공한 연구원 부인들을 빼고는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지요. 기껏해야 영어과외나 학습지 교사 정도지만 영어과외 역시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벌이가 신통치 않아요.”

    남편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5년 동안 영국에 거주한 김민정씨(40)는 대덕연구단지에서의 삶을 “평온하지만 답답하다”고 표현한다. 영국에 사는 동안 여러 나라에서 온 주부들과 활발하게 어울린 그는 ‘대전의 섬’ 같은 연구단지 생활을 갑갑하게 느낄 때가 많다. 김씨는 얼마 전 한 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회사측은 거두절미하고 나이부터 물었다. 마흔이라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35세 이상은 안 뽑는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열심히 익힌 영어실력에도 김씨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대덕연구단지에 사는 주부들이 취업을 포기하는 것은 자녀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10년 가까운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온 가족들은 고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심한 홍역을 치르게 마련이다. 남편은 새로운 일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고 아이들은 한국의 학교를 낯설어 한다. “외국에서 공부 잘 하던 아이가 정작 한국 학교에서 받아쓰기 0점을 받아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엄마가 당황하지 않겠어요.” 연구단지에 사는 주부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 한국어를 새로이 가르치다 보면 2~3년이 후딱 흘러가고 주부의 재취업 길은 더욱 멀어진다.

    일을 하기 위해 주말부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 미디어비평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은 이인희씨(31)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 다니기 위해 한 살박이 딸을 데리고 최근 상경했다. 지난해 귀국한 후 대전에서 직장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주말부부를 택했다. 고달픈 공부 끝에 이제야 안락한 가정을 얻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남편이 다시 기숙사 생활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용하고 쾌적한 환경과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생활방식, 그리고 수준 높은 학교가 있는 곳. 대덕연구단지의 특성은 대개 이런 말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미국처럼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들은 변변한 슈퍼마켓 하나 없는 연구단지 주택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학력 주부들이 적당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을 하려 해도 대전에는 우리를 받아줄 직장이 없습니다. 직업을 구하려면 결국 서울로 가야만 해요. 이것은 대전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웬만한 기업이나 문화시설 등이 서울에만 편중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미국에서 오하이오주의 소도시에 살았지만 대학원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어렵지 않게 직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한 여성의 지적이다. 연구단지에 사는 주부들은 이곳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만족한다고 말했지만 한결같이 어떤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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