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7

2001.06.07

바닷속 같은 신비한 색과 맛

  • < 여행칼럼니스트 storyf@yahoo.co.kr >

    입력2005-02-01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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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속 같은 신비한 색과 맛
    나는 담양을 특별한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담양과 어깨를 맞댄 도시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중함을 모른다.

    그런데 금성산성을 오르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담양호를 내려다보는 금성산성은 요새였다. 공룡의 등 같은 산 능선을 타고 자연석을 켜켜이 쌓아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성벽의 둘레는 내성과 외성을 합하여 6800m, 성벽을 걷는 것 자체가 가파른 산행이었다.

    산성의 남문에서 내려오다 보면 연동사(煙洞寺)로 향하는 팻말이 보인다. ‘전국 유일의 노천 법당’이란다. 절은 요사채와 작은 선방 하나뿐이고 따로 대웅전이 없다. 돈황 석굴의 한쪽을 떼어다 놓은 듯한 거대한 암벽 아래 석불이 구부정하게 서 있다. 지장보살인 그 석불이 내려다보는 산자락이 곧 법당이다. 지장보살은 고려 때에 만들었다는데, 그 보살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전설이 이 절에 얽혀 있다.

    고려 문종 때 담양에 이영간(李靈幹)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담양의 향토지에 나오는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연동사에서 공부하고 있을 소년 시절이었다. 연동사 스님은 항아리에 술을 빚어 곧잘 드셨는데, 하루는 술이 훌쩍 줄어든 것을 발견하고, 영간을 의심하였다. 스님은 영간을 불러 억세게 추궁하고 매질까지 했다. 억울한 영간은 누명을 벗기 위해서 밤낮으로 먼발치에서 술항아리를 감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술을 훔쳐먹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늙은 살쾡이였다. 영간은 살쾡이가 술에 취하기를 기다려 붙잡았다. 스님에게 데려가려 하자 살쾡이가 말했다. “만약 저를 살려주시면 평생 쓸 수 있는 비서(秘書)를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음성이었다. 영간은 홀린 듯이 살쾡이를 따라가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童子)가 나타나 책 한 권을 던져주었다. 영간은 살쾡이를 놓아주고 그 책을 들고 절로 돌아왔다. 그 후, 그 책을 통달하여 온갖 비술(秘術)을 익힌 영간은,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나아가 기이한 일을 많이 행했다. 그는 고려 시대 최고 권력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인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지냈으며, 담양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때 이영간을 통해서 연동사의 술이 민가로 내려와 담양에서 두루 빚어지게 되었다 한다.



    바닷속 같은 신비한 색과 맛
    금성산성 아래, 담양군 용면 면소재지에 연동사 술의 계보를 이어받은 술도가가 있다. 추성고을(061-383-3011) 추성주다. 추성고을 대표인 양대수씨의 증조부는 담양 지방에 전해오는 팔선주(八仙酒)를 대대손손 잊지 말고 빚으라는 비방 한 장을 남겼다. 그 비방에는 팔선주라고 썼지만, 한문으로는 秋成酒(추성주)라 적어놓았다. 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으로,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때부터 고려 성종(995년) 담주(潭州)로 바뀔 때까지 쓰였다.

    “깨끗한 찹쌀 5되, 멥쌀 1말 5되를 여러 번 씻고 물에 담갔다가, 12시간 뒤에 물을 빼고 수증기로 술밥을 찐다. 엿기름 3근, 물 3말, 미지근한 물로 갠 누룩 11근에 두충, 창출(삽주 뿌리), 육계(계수나무 껍질), 우슬(쇠무릎), 하수오, 연자육(연꽃 열매), 산약(마의 덩어리진 뿌리), 강활, 의이인(율무), 독활(멧두릅의 뿌리) 따위를 각 한 근 반씩 넣고 발효시킨다. 보름 후에 증류하여 구기자, 오미자, 갈근(칡뿌), 홍화(잇꽃), 음양곽(삼지구엽초의 잎), 상심자(오디) 따위를 넣어 혼합하여 숙성시켜 만든다.”

    여기서 약재를 다 밝히지 않았지만, 모두 20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증류시키기 전에 13가지 약재가 들어가고, 증류하고 나서 7가지 약재가 더 들어간다. 현재 추성고을에서 빚는 추성주에는 약재를 13가지로 간추려 넣는데,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서 약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소주다.

    투명한 초록빛 12。… 설명하기 어려운 고소하고 야릇한 맛

    바닷속 같은 신비한 색과 맛
    이 술이 절에서 마시던 곡차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단서가 바로 이 약재에서 읽힌다. 절 술엔 약초가 많이 들어간다. 산사의 선승들은 찬 곳에서 생활하기에, 신경통에 좋은 약초를 많이 넣어 곡차를 빚는다. 추성주에 들어 있는 두충`-`우슬`-`육계는 몸을 따뜻하게 해줄 뿐더러 관절염에 좋고, 강활`-`창출`-`독활`-`의이인은 습한 기운을 말려 찌뿌드한 몸을 가볍게 풀어준다. 관절이 쑤시고 아픈 사람에게 좋은 술로 여겨진다.

    다만 이영간이 살았을 때는 발효된 약주였고, 후대에 소주로 내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소주는 고려 후기 몽고 침략과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추성고을에서 빚는 추성주는 25。로, 마지막 단계에서는 대나무 숯으로 여과한다. 추성주는 소주로는 낮은 도수임에도 약재가 많이 들어가서 싱겁지 않고, 향이 진했다.

    그런데 술도가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추성주를 증류하기 전 단계인, 댓잎을 넣은 대잎술이었다. 술병을 들어 햇살에 비춰보니 영롱한 에메랄드 빛이다. 댓잎을 엷게 우린 듯 투명한 연초록색을 띠었다. 아니, 댓잎을 우린다고 이런 색깔이 날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신비스런 색을 머금고 있었다. 녹차 술도가에서 이런 연초록빛을 내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햇빛에 노출되면 녹색이 홍색을 띠어버린다는 것이다.

    대잎술을 바라보고 있자니, 청량한 대숲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고,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보았던 바닷물을 보는 듯했다. 술이 입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눈으로 먼저 들어와 사람을 녹인다. 그 색깔을 즐기려면 소주잔이 아니라, 둥근 와인잔이 제격이다. 더욱이 도수 12。로 와인 수준이니, 대잎술은 와인잔에 마셔도 무방할 것 같다.

    마셔보니, 술맛도 빛깔 못지 않는 독특함을 지녔다. 완두앙금빵의 향 같기도 한데, 완두앙금빵을 먹어보니 그게 아니다. 고소한데 야릇하다. 열 가지 약재가 들어갔음에도, 결코 약재의 통속적인 냄새가 아니다. 그 맛을 포착하려 몇날 며칠을 홀짝거려 보는데,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바닷속 같다.

    양대수씨는 당귀를 그냥 씹으면 그런 맛이 안 나는데, 삶으면 그런 웅숭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했다. 게다가 가격마저 저렴하다. 320mL 한 병의 출고 가격이 1560원이다. 담양 떡갈빗집에서는 3000원에 판다. “아, 담양 대숲 위에 금성산성이 숨어 있다면, 담양 대숲 속엔 대잎술이 숨어 있다!” 탄성이 절로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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