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2001.05.24

압구정,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

창의성 실종된 ‘혼혈문화’… 美 소호의 실험성, 日 긴자의 품격은 어디에

  •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입력2005-01-28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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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그래피티(American Graffiti). 직역하면 ‘미국인의 낙서그림’쯤 되겠지만, 1990년대 초반 서울 압구정동에서 한때 잘 나간 가라오케 술집의 이름이었다. ‘아메리칸 그래피티’는 그 자체로 압구정 문화의 상징이다. 미국식 이름에 일본식 문화의 짬뽕.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이상한 퓨전.

    사실 ‘압구정 문화’는 80년대 도쿄 긴자(銀座)나 하라주쿠(原宿)풍의 카페나 부티크, 술집 등이 신흥부자 동네인 압구정동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한 젊은이들은 예쁘고 독특한 이국풍의 카페를 그들만의 사교무대로 삼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늘어난 카페와 술집들은 현대-한양 아파트 건너편 단독주택가를 독버섯처럼 잠식해 들어갔다. 70년대풍의 고급주택들은 이렇게 해서 하루가 다르게 개조되었고, 속칭 ‘압구정동’이 다시 탄생했다.

    그러나 압구정동은 90년대 초반 M-TV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다시 대대적인 변모를 한다. M-TV의 뮤직 비디오에 자주 등장하는 흑인 하위문화가 음악은 물론 댄스, 패션, 건축, 외식산업, 스포츠(NBA나 ‘스트리트 농구’의 대유행도 M-TV의 수입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거의 전 지구적 영향을 미치면서 압구정동에도 실시간대의 ‘미국 냄새’가 실리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버블 경제 덕택으로 일찍 유학을 떠날 수 있던 유학생들이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맞아 압구정동에 ‘복귀’할 때마다 그곳은 때론 ‘레게의 거리’로, 때론 ‘힙합의 거리’로 몸살을 앓았다. 압구정 후미진 골목들에 뉴욕의 소호(SOHO`:`South of Houston St.의 약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래피티가 조금씩 늘어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압구정의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혼혈에 있다. 문화의 다접종교배(多接種交配)로 인한 혼혈이 오늘날 압구정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는 길 하나 건너편인 청담동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압구정동이 10대들의 ‘그저 그런’ 놀이터로 퇴색하고, 그런 것에 짜증이 난 옛 ‘압구정 오렌지’ 출신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짓기 위해 그들 표현대로 ‘럭셔리(luxury)하고 고지어스(gorgeous)’한 청담동으로 엑소도스 했다고 하지만 ‘품격이 다르다’는 것 외에는 압구정동과 청담동의 변별점이 없다. 청담동 역시 또 하나의 압구정동일 뿐. 청담동에 이른바 퓨전 음식점들이 ‘뭔가 근사한 고급음식의 이미지’를 풍기며 번성하는 것도 이 지역의 태생적 혼혈주의를 상기하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청담동을 포함해 압구정동은 긴자와 소호의 문화적 식민지인가. 그러나 압구정은 긴자가 아니다. 소호는 더 더욱 아니다. 이 지역에 화랑이 늘어난다고 해서 소호의 화랑가, 그곳의 예술정신과 견주는 일은 너무나 턱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압구정은 긴자도 아니고 소호도 아닌 그 어떤 공간을 만들었는가. 압구정이라는 장소와 공간은 우리의 도시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압구정,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후쿠하라 요시하루(福原義春) 회장은 그의 문화경영론에서 도시의 거리가 가지는 ‘장소의 의지’에 대해 말하면서 도쿄의 긴자를 예로 든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긴자가 유명해지고 주목받는 까닭은 확고한 역사`-`문화`-`환경의 체계가 갖춰진 ‘장소의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긴자는 ‘세계로 열린 창(窓)’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

    후쿠하라 요시하루는 이렇게 말한다. “긴자는 일본의 상업공간으로서 유일하게 성숙한 경험을 가졌고, 유럽의 성숙함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긴자를 오가는) 사람들은 성숙한 향기를 가슴 한가득 담아 나갔다. 향수(鄕愁)란 ‘성숙한 시절이 있었지’란 그런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긴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성숙함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나갔다. 긴자는 그러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초로 가로수를 심고 청백색의 가스등을 설치한 근대화의 거리 긴자는 고급 패션의 최첨단과 수십 년의 전통을 지키는 시니세(老鋪)가 공존하는 곳이다. 수천여 개의 고급 구라브(클럽)가 ‘도쿄의 밤’을 환히 비추는 ‘스캔들의 거리’기도 하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 根康弘) 전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郞) 총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의 3인방이 모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을 탄생시킨 밀담을 가진 것도 긴자의 요릿집이었다. 그리고 모리 내각의 나카가와 관방장관이나 노리사다 도쿄 고검장이 자리를 물러난 것도 모두 긴자 클럽 호스티스와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긴자는 이렇게 권력과 짙은 향수 냄새, 루이 비통으로 상징되는 고급 브랜드의 이미지가 어우러지면서 일류라는 ‘장소의 의지’를 보인다.

    물론 오늘날의 긴자는 경기 침체와 더불어 화려했던 ‘버블 화장’을 지우고, 편리함과 기능우선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과거 전통의 빛깔을 점차 잃어간다. 80년대 중반 이후 서울 번화가의 카페들이 ‘JUN’이란 똑같은 이름을 내걸게 만든, 일본 정`-`재계 거물들이 단골로 드나든 손꼽히는 명문클럽 ‘JUN’의 폐점 이후 긴자에서는 해마다 200~300개의 클럽이 사라졌다. 대신 들어선 것이 시간당 1만엔의 요금을 받으며 ‘명랑회계’(明朗會計)를 외치는 ‘카바클라’(카바레와 클럽의 합성어) 같은 가격파괴 술집들. 400엔짜리 쇠고기 덮밥 체인점인 요시노야(吉野家)도 미쓰코시 백화점 건너편의 1급지에 다시 자리잡았다.

    무엇에서든 일류를 장벽으로 내세워 아무에게나 호락호락 문을 열어주지 않던 긴자의 ‘품격’도 불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 이는 긴자보다 비싼 임대료(99년 기준 세계 4위, 긴자는 9위)를 과시하는 서울의 압구정동이 IMF 사태와 더불어 화려한 쇼윈도를 거두고, 그 자리를 허름한 선술집이며 점포들이 대신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다.

    압구정,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
    그러나 긴자에는 여전히 어떤 정신이 지배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의 막스마라는 지난 99년 긴자의 한복판에 땅을 사고 사옥을 마련했다. 프랑스 에르메스가 98년 일본 대표적 시계업체인 세이코 소유의 노른자위 땅을 사들여 만든 매장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막스마라가 산 그곳 역시 하필이면 거품경제 시절 일본 소비자금융업체인 레이크가 해외에서 매입한 명화를 전시하는 화랑으로 쓴 곳이었다. 막스마라측은 이 땅을 사들이면서 “도쿄 긴자 한가운데에 사옥을 두었다는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상징성일까. 바로 후쿠하라가 말하는 ‘장소의 의지’나 ‘일류의 품격’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지는 소호에서도 당연히 발견된다. What Comes Around Goes Around. 소호에 자리잡은 긴 이름의 이곳은 단순한 중고 패션 상점이 아니다. 중고품인 ‘리바이스 505 빅 E’ 빈티지 진의 가격이 700달러를 호가하는 이곳은 패션업계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담아놓은 패션 박물관과도 같다. 이런 상점의 존재는 아마도 가난한 화가들의 천국에서 화랑의 중심지인 미술 1번가로, 다시 세계 정상급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으로 발돋움하는 소호의 변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금은 임대료가 올라 이웃의 첼시나 그리니치 빌리지, 강 건너편 브루클린 등으로 화랑들이 이동하고 있지만, 소호는 여전히 갤러리의 천국이다. 세계 50대 화랑 대부분이 몰려 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일본의 자존심이라는 대중 의상디자이너 타야마 아츠로가 이곳에 대형 매장을 개설하는 등 패션 부티크가 200여 개 이상 들어선 것도, 신인화가들의 발랄한 실험적 작품을 탄생시킨 이 지역만의 독특한 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소호적 예술정신이 가난한 화가들이 떠나간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도전적이고 개성이 강한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을 키운다는 얘기다.

    소호 화랑가 30년의 경험을 통해 ‘소호에서 만나는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라는 책을 펴낸 강은영씨는 “소호라면 화랑가라기보다 첨단을 걷는 유행의 거리라는 인식이 적절하다”면서 “서울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거리와 상통하는 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멋진 바(bar)나 고급 의상 부티크, 국적 불명의 퓨전 음식점이 즐비하다는 점에서만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소호를 “맨해튼의 에너지가 집성된 곳”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이 과연 서울의 에너지가 집성된 곳이라 할 수 있을까. 과연 지금의 압구정동에서 찰리 파커의 광적인 색소폰 연주처럼 등장한 장 미셀 바스키아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압구정 그래피티가 한때 소호의 담벼락마다 낙서그림을 그려댄 바스키아 흉내를 낸다고 해서 열정적인 예술혼까지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압구정에는 무엇보다 첫사랑과 같은 강렬한 정신적 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 압구정, ‘품격의 다름’을 강조하는 청담동에서도 ‘의지’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우리의 창의성으로 가꾸는 문화적 의지 말이다. 그것은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이 시 ‘고향’에서 고향의 집을 ‘고전(古典)도 없고 현대도 없는 집’이라 읊던 것과 같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은 소호나 긴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울 그 자체도 아닌 듯하다. 하나의 사조(思潮)를 형성할 만한 ‘서울적 또는 강남적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 동네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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