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4

2001.05.17

똥아 똥아… 네가 예술을 아느냐

아동문학·미술작품에도 단골 소재로 등장 … 풍자와 해학 뛰어넘어 대중문화 화두로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입력2005-01-26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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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아 똥아… 네가 예술을 아느냐
    과학기술부 김영환 장관은 과거 민주당 대변인 취임에 즈음해 대변인 제도의 문제점을 풍자하는 ‘똥똥인’이라는 동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대변인으로 임명되어/ 집으로 돌아온 날/ 딸내미들이 나를 놀린다/ 아빠~/ 대변인이 뭐야요/ 대변인이니까 아 똥이네/ 그러니까 아빠는 똥인이구~(중략) 아니 요놈들이 벌써 내가 허구한 날 남을 헐뜯고/ 박터지게 싸움이나 하는/ 그런 대변인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후략).

    지난 97년 ‘똥 먹는 아빠’라는 동시집을 내기도 한 김장관이 이 동시를 발표할 당시 정가의 반응은 당혹스러웠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변인, 곧 ‘정치인은 똥인’이라는 풍자가 일반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것.

    “동화문학의 혁명” 찬사 속 상업적 부작용 제공 지적도

    1917년 뒤샹은 기성품 변기를 전시장으로 가져와 턱 하니 미술작품이라고 내놓았다. 변기를 전시장에 배치함으로써 원래의 기능인 배설용기에서 벗어나 하나의 미술적 조형물이 된 것. 이것은 상투적인 미술적 ‘오브제’ 개념이 처음으로 깨지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바꿔 말하면 뒤샹은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들이 미술이라고 믿는 것은 다 똥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똥은 단순한 풍자와 해학의 영역을 벗어났다. 출판, 미술, 영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이제 똥은 중요한 화두이자 의미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시장에서부터 화랑을 찾는 고급 취향의 성인들까지 다양한 의미와 상징의 ‘똥 세례‘를 받았고, 똥은 우리 시대의 문화코드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

    ‘아기코끼리의 똥’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강아지똥’ ‘똥 뿌직!’ ‘주먹만한 내 똥’ ‘똥이 어디로 갔을까’ ‘똥벼락’. 이는 최근 몇 년간 각종 어린이책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에 오른 동화책의 제목들이다. 우리 출판시장에서 최근 3~4년간 가장 큰 신장세를 보인 분야가 유아-어린이 도서분야고, 어린이책 출판시장의 성장과 그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똥이다.

    똥아 똥아… 네가 예술을 아느냐
    지금도 각 출판사는 앞을 다퉈 똥 시리즈를 내기에 바쁘다. 이런 ‘똥 열풍’에는 어린이책 시장의 변화가 담겼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먼저 똥은 어린이책이 다룬 소재의 금기를 깨면서 다양성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초적인 생리현상이면서 비하 대상인 똥을 과감히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그동안 교훈성만 강조하거나 단순한 학습 보조 교양서로만 인식한 어린이책이 비로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졌다는 의미를 가진다. 교훈보다는 관심과 재미가 책 기획의 주요 덕목으로 등장한 것.

    학부모 오진원씨는 “아이들은 똥이나 방귀 얘기를 무조건 좋아한다.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친근하게 받아들인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재미나게 읽어 내려가면서 똥은 쓰기에 따라 귀한 것이 될 수 있고, 천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일러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책들 가운데 권정생씨의 ‘강아지똥’은 ‘똥’이 당당히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감동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자연의 감동스럽고 신비스러운 이치를 쉽게 보여줬다. “우리 동화문학에 혁명을 가져왔다”(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씨)는 평을 얻을 정도. 이에 따라 똥이란 소재는 아동문학 소재의 다양성에 따른 진일보한 풍토를 만듦과 동시에, 어린이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똥 붐’은 상업적 부작용을 낳는 원인도 제공했다. 최근에 와선 짜임새 있는 창작동화 구조보다는 ‘튀는 이야깃거리’를 찾으려는 소재주의가 만연한 것.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남미영씨는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별 의미 없이 ‘똥’이라는 말만 난무하는 책도 많다”면서 “지금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유행이 지나면 곧 진실한 주제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고상한 작품들만 전시할 것 같은 화랑에서 ‘화장실’이나 ‘변’과 관련한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이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똥’을 그리는 화가도 있다. 1999년 갤러리 사비나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 안창홍씨는 개가 똥을 싸는 그림과 화가 자신의 똥 싸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발칙한’ 그림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그의 작품은 욕망을 통제하고 금기시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조롱’과 ‘저항’의 의미로 읽힌다. 그의 드로잉 작품 중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똥을 누는 사람을 그린 것도 있고, 국회의사당 지붕 위로 똥이 쏟아지는 ‘똥벼락’이라는 그림도 있다. 개가 똥을 싸는 그림에는 ‘시원하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인간과 세상을 향한 공격적인 제스처가 똥을 누는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세상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랄까. 가장 더럽고 1차원적 사물인 ‘똥’으로 권력과 욕망에의 집착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안창홍).

    똥아 똥아… 네가 예술을 아느냐
    대변, 소변, 침, 정액, 방귀 같은 소재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데는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영화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오스틴 파워’ 따위의 할리우드 영화와 ‘자카르타’ ‘휴머니스트’ 등 우리 영화에 이르기까지 분방한 유머를 내지르는 난장판 코미디물에는 화장실과 그 내용물을 부각시키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누군가 싸놓고 간 오물을 커피로 착각하여 마시고(‘오스틴 파워’), 주인공들이 똥벼락을 맞고(‘덤 앤 더머’), 매 맞아 오른 독을 치료하기 위해 똥물을 퍼마시는(‘휴머니스트’) 엽기적인 장면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코미디 영화들이 가장 사랑하는 메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디 앨런식 은유적인 농담은 힘을 잃고, 영화는 직접적-구체적인 웃음과 일회적-파열적인 배설 욕구의 쾌감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코미디 영화에선 배설 욕구 쾌감으로 관객 사로잡아

    이들 영화의 유머 역시 ‘시대 정신의 조롱’으로 읽을 수 있을까. 영화평론가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심영섭씨는 최근 영화에서 만개한 화장실 유머를 ‘일종의 사회적인 퇴행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배설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즐거워하는 것은 자신의 배변을 대견한 업적으로 생각하고 화장실 물을 내릴 때, 이 ‘업적’과의 결별을 슬퍼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항문기로의 퇴행과 비슷한 감정상태라는 것. 그는 “80년대만 해도 ‘스타워즈’나 ‘인디애너 존스’ 등에서 나타나듯 아버지와 경쟁하고 극복하려는 오이디푸스 시기에 속하였다. 여기엔 자아를 통제하고 자극하는 초자아가 있다. 그러나 화장실 유머엔 초자아가 없다. 부모들에게 초자아 대신 물질적 풍요만을 물려받은 90년대 아이들이 과잉 배설욕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황금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천민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똥이 있는가 하면, ‘웃기면 다’라는 식의 퍼질러 놓는 똥도 있다. 풍자와 조롱의 골계미가 되었든, 무의식적인 퇴행의 욕구가 되었든 이 시대의 똥은 인간의 욕망을 대리 성취해 주는 또 하나의 팬터지 세계를 만들어 간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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