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2001.05.10

말없이 다가와 ‘타버린 불꽃’

내가 겪은 ‘중년의 일기’ … 치열한 자신과의 전쟁 겪고 비로소 나의 길 찾아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입력2005-01-25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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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최인호는 ”나는 나이 마흔둘에 내가 이 세상의 진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기꾼임을 깨달았고, 극심한 영혼의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외부에서 받는 갈채가 갑자기 아무런 의미없이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송이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데 방해만 되었다는 사실을 40대에 이르러 깨달았다는 것.

    예술가들의 생애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그들 대부분은 중년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렀다. 우리가 아는 유명인들 중에서도 ‘위기의 40대‘를 보내면서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으며 더욱 유연하고 매력적으로 바뀐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디 예술가나 유명인만 그럴까. 보통 사람에게도 그러한 ‘인생의 과정‘은 비슷하다. 우명인이 들려주는 ‘나의 중년일기‘를 통해 40대의 위기와 기회에 대해 알아본다. 그들은 40대를 진정한 인생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나이‘라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큰 상처”

    말없이 다가와 ‘타버린 불꽃’
    “성병과 무좀에 걸려보지 않고는 사내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배우 최종원씨(52). 그는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있지만 불륜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몇 년 전 그는 누군가가 포기한 연극에 대타로 투입되었다.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어도 배역에 정이 안 갔고,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였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연기를 그만두었다가 오랜 만에 연극판에 돌아온 상대 여배우와 숱한 밤을 새우며 연습하면서 겉보기와 달리 여리고 상처가 많은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렸다.

    함께 대학로를 걷고 연극인들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고, 그들은 불륜관계로 낙인찍혔다. 그는 또한 TV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여성과 자연스런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운전기사를 통해 그의 부인이 이런 사실들을 알면서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아내는 앓아 눕고 아이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더군요.”

    그는 졸지에 부끄러운 가장이 되었다. 아무리 항변해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죠. 제 아내 역시 나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요.”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받을 상처 역시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말없이 다가와 ‘타버린 불꽃’
    극작가이자 인기 드라마 작가이며, 서울예대 교수인 윤대성씨(63)는 얼마 전 자신의 체험을 담은 자전적 연극 ‘당신, 안녕’을 선보인 바 있다. 제자와의 사랑과 부부 갈등을 다룬 연극의 내용처럼 그도 한때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북한 출신으로 깐깐한 성격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는 결혼 초부터 사사건건 부딪쳤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시달리던 그는 작품에 몰두한다는 핑계로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아내 역시 적잖이 지쳐 있었고, 부부가 만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 언성만 높이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문하생 겸 비서로 일하겠다며 그를 찾아온 젊은 여인이 있었다. 번잡하고 짜증나는 현실을 잠시 외면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달콤함 속에 그도 모르게 사랑이 싹텄다.

    “그녀 덕분에 창작욕에 불이 붙어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시작한 당의정 같은 사랑은 오래 가지 않지요.”

    그는 작품 집필을 위해 지금도 오피스텔에 나와 지내지만 요즘은 아내와 ‘연애중’이다. 익숙함과 권태로 지극히 덤덤해지기 쉬운 중년의 부부생활에서 벗어나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 그리움과 회포를 진하게 풀어내는 것이 그가 부부관계를 회복한 노하우.

    말없이 다가와 ‘타버린 불꽃’
    베스트셀러 작가 겸 정신과 의사인 김정일씨(44). 그 역시 한때는 ‘인생에서의 가장 큰 성공은 사랑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 지상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최근 ‘사랑에 목매달던 중년의 방황’을 끝냈다.

    “사랑의 끝은 현실이고 현실의 끝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아내들은 가정을 지키려는 본능적 잠재의식에 의해 현실적이고 투쟁적이 됩니다. 남편의 잘못된 점을 교정하고 때로는 지배하려 들지요. 저 역시 성격과 기질이 전혀 다른 아내와 숱한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다른 여성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신이 무시당하였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어디 한번 당해보라’는 식의 ‘외도’도 있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호소하면서 다가온 청순가련형의 젊은 여인에게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언제나 자신을 최고로 인정하는 여인에게서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가정도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다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강진이었다.

    한없이 순수하고 뜨겁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사랑이 알고 보니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여성(일명 꽃뱀)의 술수에 말려든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큰 홍역을 치러야 했던 김씨. 철없는(?) 남편의 방황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참아준 아내 덕분에 그는 비로소 중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말없이 다가와 ‘타버린 불꽃’
    행위예술가, 연극배우, 극장대표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심철종씨(41). 초등학생 아들을 둔 어엿한 중년 가장이지만 그는 아직도 불 같은 사랑에 대한 미련을 던져버리지 못한 로맨티스트다.

    “결혼생활은 아무래도 현실과 여러 조건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뜨거운 열정을 맘껏 불태우는 관계가 되기는 힘든 것 같아요. 아내를 사랑하지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이 늘 비어 있는 것 같은 감정은 어쩔 수 없더군요.”

    몇 년 전, ‘정말, 이 여자다’ 싶은 그런 여자를 만났다. 날이 갈수록 사랑은 깊어갔고 그녀는 남자의 이혼을 원했다. 사랑에 관한 한 천하의 열혈남아인 그였지만, 이혼으로 입을 어린 아들의 상처를 생각하니 가슴이 막막해졌다. 결국 그녀는 떠나버렸고 불꽃 같던 사랑은 맥없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사랑의 끝은 허무할 수밖에 없더군요. 내 이기심만으로 가족들을 아프게 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맘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내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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