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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동성애자들 “차별대우 이제 그만!”

인터넷 홍보 등 권익보호에 목청 높여 …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도 사실은 ‘게이’

러, 동성애자들 “차별대우 이제 그만!”

러, 동성애자들 “차별대우 이제 그만!”
국내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인권보호 입법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야 및 정부 모두 동성애와 같은 성적 성향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권의식이 점차 확산되는 것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로, 보수적인 러시아에서도 동성애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사실 러시아에서 동성애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며 문화예술분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70년이 넘는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동성애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90년대 초 페레스트로이카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의 동성애자들은 지하에서 나와 단체를 결성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홍보활동을 펴고 있다.

먼저 러시아에서 동성애가 퍼지게 된 경로를 살펴보면 그리스를 발원지로 서쪽으로는 로마인에게, 동쪽으로는 스키타이인에게 전해졌다. 고대 슬라브인들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형적 요인과 혹독한 기후로 인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성애를 접했지만, 그들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사료와 교회 관련 문서들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동성애가 급속히 확산된 것은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긴 뒤인 15~17세기로 추정된다. 그 당시 러시아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여행기를 보면, 동성애 풍습이 농가에서 황궁까지 만연해 있었고, 러시아 남성의 상당수가 수염을 뽑고 볼에 붉은 분을 칠하고 다녔다고 전한다. 러시아의 국교인 그리스정교는 수도원 내에 어린 소년들의 출입을 단속하는 등 동성애가 확산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행위에 대해서는 애써 모른 체했다.

중세유럽이 동성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한 것에 비해 당시 러시아는 동성애를 그다지 죄악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반 대제, 에카테리나 여제, 표트르 대제도 동성애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유럽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러시아인도 동성애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기의 문학 작품에는 동성애를 소재로 한 것이 심심찮게 등장했으며, 많은 문호와 예술가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성애 기질을 갖고 있었다. ‘죽은 영혼’ ‘대장 부리바’로 유명한 작가 고골리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종교-도덕적인 이유로 심한 갈등에 빠져 고통스러워했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젊고 건강한 남성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뜨거운 감정을 고백하기도 했다.

말년에 고골리가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 자신의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혐오하게 됐으며 일부러 단식을 하다 43세의 나이로 아사했다는 설은,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동성애자였다. 23세에 쓴 일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여성에게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남성은 내게 깊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동성애라는 것의 개념조차 몰랐던 그때에 나는 이미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의 이러한 성적 정체성이 ‘유년시절’ ‘안나 카레니나’ ‘부활’에서 여러 차례 암시돼 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유명한 동성애자였다. 그가 공부했던 음악학원은 급우간의 동성애가 흔했던 곳.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숨기고 싶어 여성과 결혼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야 나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게 됐다. 이렇게 결혼하고 나서야 나는 원래의 내 모습대로 살지 않는 것만큼 무익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가 양성연애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러시아인의 이중성은 인류가 아직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던 원시시대의 정신유산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1832년 전까지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종교-도덕적인 문제가 될지언정 범죄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832년 개정된 법은 ‘계간’(鷄姦·남성들간의 성행위)을 하는 자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며 4~5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다’며 동성애를 범죄로 취급했다. 하지만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증명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어서 이 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본격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러시아에 혁명의 기운이 감돌면서 도덕과 금욕의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혁명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동성애를 혐오했으며 혁명에 투신한 여성에 대한 찬양 외에 모든 이성간, 동성간 감정은 혁명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이후 소련에서 동성애를 박해하는 근원이 됐다.

1933년 12월17일 구소련에서는 악명 높은 형법 121조가 통과됐다. 이 법은 ‘동성애자를 5년 이상의 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동성애는 이제 반혁명적인 행위로 죄악시됐고, 부르주아의 도덕적 파탄이라고 규정됐다. 이 법에 의해 1930년부터 1980년까지 매년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감옥과 강제수용소는 소련 역사상 동성애가 가장 ‘잔인하게’ 확산된 곳이었다. 또 형법 121조는 사회통제와 감시의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KGB(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는 각계 인사들 가운데 동성애자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 이들이 정권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즉시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동성애자들은 외부활동을 차단당한 채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성적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각종 성병이 급속히 확산됐다.

1980년대 말 정부는 동성애자들을 에이즈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더욱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처럼 극단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태도는 오히려 동성애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의 동성애자들은 정체성을 강화하고 ‘게이와 레즈비언 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 기관지 ‘테마’를 발행하는 등 자신들의 권익과 친목을 다지게 됐다.

1997년 러시아는 동성애자들의 인권도 존중돼야 한다는 세계적 흐름에 따라 형법 121조를 폐지했다. 이러한 법률상의 변화와 더불어 동성애를 바라보던 사회의 차가운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9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동성애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사람들은 전체의 33%에 달하고, 동정적인 태도는 겨우 6%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동성애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타인이 간섭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전체의 40%에 이르렀다.

러시아인의 폐쇄적 민족성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미루어 볼 때,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동성애 관련 단체를 아우르는 ‘동성애자 공동체’가 가까운 시일 내에 탄생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음성적 활동에서 벗어나 PC통신, 인터넷 등을 통한 홍보와 동성애자를 위한 잡지 발간 등은 그들의 성적 지향성을 당당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주간동아 2001.05.10 283호 (p60~61)

  • < 남혜현/ 연세대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russ3023@unitel.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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