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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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세피아 미국서 급브레이크

교통사고 운전자 車 결함 주장 소송 제기… 패소 땐 천문학적 금액 배상 가능성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

    입력2005-02-22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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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나가던 세피아 미국서 급브레이크
    한국차 흔들기인가, 아니면 여전히 한국차가 문제인가.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한국차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미국 내에서 일고 있는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최근 집단소송에 직면, 기아차의 미국 수출 전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올 들어 경기 하락으로 미국 내 자동차 판매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예상 외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1월 중 미국에서 2만2258대의 자동차를 판 현대모터아메리카(HMA)의 경우 2월 중에도 2만4800대를 팔아 2개월 동안 4만7058대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이는 지난해 동기 대비 41%의 판매신장으로 올해 미국 자동차 시장의 판매가 6% 이상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과 크게 비교된다.

    기아모터스아메리카(KMA) 역시 2월 중 미국에서 세피아 3513대, 스포티지 2745대, 스펙트라 1367대, 리오 3784대, 옵티마 1256대 등 총 1만2665대를 판매했다. 2월 중 판매신장률은 지난해 동기 대비 11.2%지만 1, 2월 판매 누계는 1만9535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28.9%의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국산차가 이처럼 선전하고 있는 가운데 제기된 소송에 대해 당사자인 기아자동차측은 “수입차를 견제하려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표적이 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자동차 업체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인 만큼 최근 ‘싸구려 차’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한국차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잘나가던 세피아 미국서 급브레이크
    기아차에 대한 소송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최근 발매된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 신문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기아차 세피아를 타고 가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자동차가 제대로 멈추지 않아 사고를 낸 한 여자를 대리해 낸 소송에서 이 사고는 운전자의 잘못이 아니라 세피아의 브레이크 결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이들은 그 근거로 98, 99, 2000년식 세피아의 브레이크 문제와 관련한 불만 건수가 미 고속도로교통안전국에 300건 이상 접수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브레이크 결함이란 브레이크 저더로 100km 이상 고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전후로 흔들리면서 떨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번 소송은 집단소송이기 때문에 기아차가 패소하면 소송을 내지 않는 다른 피해자에게도 같은 효력이 미친다. 이들이 추산하는 미국 내 세피아 판매대수는 97년부터 지난해까지 16만6000대.

    이번 소송의 쟁점은 세피아의 브레이크 결함 여부, 그리고 기아차가 세피아 개발 과정에서 또는 그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다. 김동기 뉴욕변호사는 “현재로선 소송의 초기 단계여서 결과를 예측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미국의 경우 자동차 메이커가 결함을 알고도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인정되면 배심원들의 손해배상 평결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아차는 별것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아차 홍보실 관계자는 세피아에 브레이크 저더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소송을 제기한 필라델피아 로펌이 교통사고를 낸 사람들 뒤나 쫓아다니면서 소송을 부추기는 브로커 수준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기아차 소하리연구소 이종인 상무도 “소송의 초기 단계여서 원고측에서 문제삼는 내용을 파악하는 중이긴 하지만 이번 소송에서 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 상무는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 이후 실무진들을 필라델피아 현장에 보내 조사한 결과 필라델피아 교통 신호체계가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 교통 신호등의 신호 주기가 짧고 신호등 사이의 거리도 짧은 탓에 브레이크를 가혹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생긴 문제일 뿐 세피아 자체의 결함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과연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기아차 경영진들이 세피아의 결함을 나중에 알았으나 이를 무시한 채 미국 수출을 계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이종인 상무 주장대로라면 필라델피아에서 운행되는 다른 회사 차에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 봐도 세피아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 “실무자들이 우려했던 문제가 이제야 터졌다”고 털어놓았다.

    기아차 내부에서 세피아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96년 크레도스에 똑같은 문제가 제기됐을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기아차 이종인 상무는 “국내에 시판된 세피아는 브레이크 저더 문제가 없었다”고 단언하지만 실무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기아차 관계자는 “96년 크레도스 브레이크 저더 문제가 부각돼 이를 무상 수리해주었을 당시, 국내의 세피아 고객들 역시 소수이긴 하지만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수출하는 세피아에 대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실무진들이 건의했으나 담당 임원 선에서 묵살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그 임원은 현대의 기아차 인수 이후 오히려 승진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임원은 기자와의 접촉을 거부했다.

    잘나가던 세피아 미국서 급브레이크
    기아차가 96년 브레이크 저더 문제와 관련, 크레도스 브레이크 부품을 무상으로 교환해준 것 역시 자발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소비자보호원에 이와 관련한 불만이 접수되고 건설교통부의 제작 결함 여부 확인 조사와 권고를 받은 이후 이루어진 조치였다. 기아차가 95년 5월 현대자동차의 쏘나타Ⅲ를 겨냥, 의욕적으로 내놓은 크레도스는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았다.

    당시 크레도스 고객들은 브레이크 부품을 교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 뒤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기아차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기아차는 크레도스 브레이크 저더 문제가 제기된 지 1년 만인 97년 말 무렵에야 브레이크 저더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크레도스 브레이크 부품을 교환한 사람들은 여전히 브레이크 저더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이번 소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기아차가 세피아나 크레도스 개발 과정에서 브레이크 저더 문제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현대차가 98년 말 기아차를 인수한 이후 브레이크 저더 문제를 개발 과정에 인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자동차 개발은 주행시험 과정에 나타나는 문제를 보완해나가는 게 상당히 중요한데, 과거 기아차의 주행시험 방법으로는 브레이크 저더 문제를 인식할 수 없었다”면서 “주행시험 방법을 현대식으로 바꾼 이후에야 가능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기아차의 주행시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미국에서 세피아의 브레이크 저더 문제가 불거졌을까. 자동차 전문가들은 미국 시장의 방대한 규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전문가는 “1년에 승용차가 1600만대 이상 팔리는 미국에서 1년에 수만대 팔리는 세피아의 경우 설령 문제가 있었더라도 단기간에 집단화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은 자동차에 결함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불거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삼 확인해주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체 경영진들이 소비자에게 자동차를 인도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이런 소송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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