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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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신화의 두 얼굴… 막 내린 ‘정주영식 경영학’

가족중심 기업경영, 독특한 승계방법 … 현대정신 성패 여부는 경영진의 몫

  • 입력2005-02-22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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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신화의 두 얼굴… 막 내린 ‘정주영식 경영학’
    지난 3월25일 한국 경제발전사의 과거로 영원히 떠나버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그는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여섯 살에 무작정 상경하여 부둣가와 건설현장의 막노동자, 쌀가게 점원 등을 전전하다가 그 때 번 돈으로 자동차 수리업을, 그리고 47년 ‘현대토건사’ 간판으로 건설업을 시작하여 큰 돈을 거머쥐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건설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구축한 현대는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최대 재벌의 하나로 우뚝 섰다. ‘하면 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창의적 노력, 진취적 기상으로 한 해 매출액 100조원, 종업원 20만명, 협력업체 1만6000개를 자랑하는 대그룹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렇듯 현대그룹은 반세기에 걸쳐 당대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유독 경영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정(鄭) 패밀리’로 구성되었다 하여 비난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대다수 국민은 물론 북한 당국자까지 나서 정주영 회장을 추모하는 마당에 정주영식 기업경영방식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리고 가족 사업경영의 경우 창업 이후 언제까지나 가족의 지배 하에 있어야만 하는가.

    우리나라의 가족기업은 대부분 창업자를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소유권을 유지하면서 기업의 계속적인 성장,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한국 전통문화에 바탕을 둔 우리 기업문화의 특성 중 하나는 기업을 가족집단으로 파악한다는 것과 운명공동체로서의 기업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원래부터 기업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1세대 기업인들은 기업을 집이나 가족의 확대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유교문화 속에 들어 있는 충효사상은 바로 가족과 국가를 전제로 하는 집단주의를 표방한다. 따라서 혈연-학연-지연으로 이루어지는 가족경영-족벌경영의 기업풍토는 한국적 전통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식 가족경영도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공동의 운명을 띠고 태어났다.

    가족주의를 원형으로 하는 집단주의의 문화적 토양에서는 특히 상부상조를 통해 구성원 모두가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 화합하고 협조하는 데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더욱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소유경영문화 속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인화중심의 집단주의가 더욱 중요시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우리나라의 기업은 권한이 상위층에 집중되었으며 권위주의적 성향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도 소년시절에 훈장인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교육을 받았다. 또한 장남인 그는 부친으로부터 일찍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신념을 이어받으면서 현대호(號) 최고경영자로서의 구상을 준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유교적 기업가정신을 갖고 일평생을 한가족의 번영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경세가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세기에 걸친 성장 끝에 ‘글로벌 현대그룹’이 된 이후에도 현대는 창업자인 정주영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통제형 의사결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힘은 절대적이었고 구심점은 아산(峨山)을 정점으로 하는 ‘정(鄭) 패밀리’의 가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생전에 정주영은 ‘우리 현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상조공생하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통해 인화를 도모하고 사원들을 이끌어왔다. 이는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가족집단주의적 공동체의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그룹의 사훈이 창업 당시부터 ‘근면-검소-친애’로 되어 있는 것도 그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족집단주의에 근원을 둔 인화사상의 표출이라고 풀이된다.

    그렇다면 언론에 의해 ‘왕자의 난’이라고까지 묘사되었던 현대그룹 가족사업방식의 기업 승계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최근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세계 경제계에서는 기업승계 창업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기업승계의 성공 여부는 고용 유지 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정부의 창업지원 정책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기업승계 계획에 대한 사전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지속적인 기업운영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고, 결국은 실업자 발생이라는 사회적인 부작용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기업 소유주에게도 가족기업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선진국에서조차도 가족기업 중 성공적으로 2세대에게 승계되는 경우는 3분의 1이 채 되지 않고, 3세대에까지 성공적으로 넘겨주는 경우는 13%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만약 현대처럼 여러 명의 형제가 승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면 더더욱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족기업에서 경영권이 이전되는 기간 중에 경영권 장악을 위한 격렬한 투쟁이 있을 수 있고, 이러한 기간에 그 기업의 사세가 쇠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가족경영사업이 겪게 되는 가장 고민스러운 경험 중 하나가 창업주 최고경영진의 세대교체 문제다. 왜냐하면 창업주는 최고경영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려고 하는 반면 그의 후계자들은 이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족기업의 후계자 승계에 관한 일부 연구자들은 성장기업에 있어서는 가족경영을 전문경영으로 전환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경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 때문에 가족이나 기업 혹은 양자가 모두 망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경영자는 족벌경영 때문에 야기되는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기업의 성장에 이로운 방향으로 자원을 집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의견도 있다. ‘포천’지에서 500대기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에 있어서 가족소유 혹은 가족경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약 150개 정도의 기업은 개인 혹은 가족 몇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경우도 기업경영형태의 가장 큰 특징은 가족 사업경영이며, 기업승계방식 중 가장 많은 것 또한 가족 내 승계(42.5%)다. 또한 기업규모가 큰 경우일수록 기업 내 승계를 당연시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비난이 되고 있는 가족사업승계방식이 선진국에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 규모가 큰 경우라도 가족 구성원이 후계자로 승계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더욱 중요시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오너경영문화, 특히 정주영식 가족경영의 문제는 민주화와 사회개혁의 물결 속에서 많은 기업 구성원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으며, 중앙집권적 경영체계의 연공중심제도는 개방경제와 국제적 경쟁체제 아래서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세대 신입사원은 전통적인 ‘현대정신’의 일방적 수용을 거부하고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회사 라는 가족집단주의적 의식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전통적인 문화가치와 새로운 문화가치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급변하는 세계의 기업환경 속에서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기업 승계문화의 개발을 요청받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타계는 이러한 과제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셈이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위대한 영웅인 최고경영자(CEO)가 치러야 할 마지막 시험은 얼마나 후계자를 잘 선택하는지와 그의 후계자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양보할 수 있는지다”는 말은 정주영 회장을 떠나보내면서도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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