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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출판계의 자존심 ‘문학전집’

피땀 밴 순수문학 결정체

피땀 밴 순수문학 결정체

피땀 밴 순수문학 결정체
지난해 여름 출판사 ‘열린책들’이 전 25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냈을 때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7년의 제작과정과 4억8000여만원(광고비 포함)의 제작비용을 감당해낸 출판사의 용기가 감탄스러웠고, 또 러시아 원본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초기에는 판매도 순조로웠다. 제작비를 건질 수 있는 2000질을 목표로 삼았는데 발매 3개월 만에 1000질이 판매돼, 한국 문학독자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은근한 자부심도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금년 들어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판매는 1500질에서 답보상태다. 살 만한 독자들은 이미 다 샀고 새로운 독자층은 형성되지 않는, 순수문학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또 일부 독자들에 의해 제기된 오역과 오자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것은 자칫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발간이 갖는 의미마저 훼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다. 영어판, 일어판의 중역에 중역을 거듭하며 읽기 좋게 윤색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때로는 러시아 사람들이 읽어도 혼란스러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일곱 차례나 교열을 거쳤음에도 매서운 독자들의 눈에 잡힌 오탈자는 그렇다 치고, 독자들이 중역된 작품과 원본 번역을 비교하면서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출판사나 번역자 모두 당황하는 눈치다. 매끄러운 문장으로 다듬기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다 보니 어색해진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중역본에 길들여진 독자들의 원본 번역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생긴 오해도 있다는 항변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전문가들의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부분적인 일로 수년에 걸친 출판 역작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닐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 ‘책세상’ 출판사가 또 하나의 역작을 내놓았다. 13권짜리 ‘릴케 전집’. 2000년 2월 첫 권 ‘기도시집 외’를 시작으로 매달 한 권 꼴로 펴낸 것을 모으니 어느새 13권이 됐다. 뛰어난 감수성으로 독일 서정시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눈을 씻고 보아도 돈 벌 책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그나마 소설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릴케의 시를 중심으로 산문, 단편소설, 평론까지 작품세계를 망라한 릴케 전집은 전문 연구자가 아닌 바에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출판사가 14명의 번역자를 동원해 2억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을 들여 이 전집을 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세상측은 “그동안 릴케의 시-산문작품들이 체계적인 분석 없이 무작위로 발췌, 번역되면서 릴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결여돼 있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로 시작되는 릴케의 유명한 시 ‘가을날’(형상시집)은 마구잡이로 발췌돼 여기저기 실려 있다.

그러나 책세상측이 독일 인젤 출판사의 ‘릴케 전집’을 토대로 만든 이 전집은 ‘기도시집’ ‘형상시집’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대부분 제목만 들어보았을 그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헌시, 시작노트, 유고시, 단편소설, 산문, 중-후반기 예술론, 희곡 등 릴케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했다.

특히 13권 중 10권 분량의 시와 ‘보르프스베데’(독일의 화가촌), ‘예술론’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어서 독일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는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상당히 높다.

그러나 릴케의 작품은 단지 독일문학 연구자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릴케는 프랑스어로 쓴 상당 분량의 시를 남겼는데 번역을 맡은 김정란 교수(상지대·불문학)는 “릴케에게 이런 시가 있는지 몰랐다”며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비유와 상징, 탁월한 메타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5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 전집’과 13권짜리 ‘릴케 전집’을 놓고 떠오르는 생각은, 무모하기까지 한 이런 우직한 작업들이 상업화로 황폐해진 출판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주간동아 2001.02.15 271호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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