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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백일몽이었나, 닷컴열풍

거품 빠진 초라한 닷컴, 그래도 '신경제의 엔진'

‘묻지마 광풍’ 지나간 자리엔 찬 바람만… 옥석 가려내고 ‘체질 개선’ 절호의 기회

거품 빠진 초라한 닷컴, 그래도 '신경제의 엔진'

거품 빠진 초라한 닷컴, 그래도 '신경제의 엔진'
‘벤처 지원 및 인터넷사업 대폭 강화‘ ‘벤처캐피털 올해(1999년) 대박’ ‘거래소에서 코스닥으로 옮기는 기업 나온다’ ‘너도나도 인터넷사업’….

지난해 말 일간지 경제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헤드라인들이다. 국내 닷컴산업의 본산인 테헤란밸리를 필두로 올 한 해 닷컴기업들은 숱한 화제를 뿌렸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회생의 발판으로 급부상한 닷컴산업이 ‘코스닥 광풍(狂風)’을 불러일으키며 2000년은 온통 ‘닷컴 열풍’으로 끓어올랐다.

하지만 6월 이후 본격화한 ‘닷컴 위기론’과 더불어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한 겹 거품이 걷힌 지금은 어떤가. ‘21세기 지식정보강국 구현’이란 정부의 모토마저 퇴색된 세밑, 정체성을 잃은 닷컴세상은 삭풍이 휘몰아치는 ‘동토’로 변했다.

불과 1년 만의 이런 극명한 대비 속에서 정작 ‘닷컴인’들은 어떤 변화를 체감했을까. 그들의 대차대조표는 제각기 다르지만 한 해 동안 이어진 ‘닷컴 열풍’의 굴곡을 묘사하기엔 모자람이 없다.

거품 빠진 초라한 닷컴, 그래도 '신경제의 엔진'
㈜LG-EDS시스템 기술대학원 경영교육팀의 박현기 전문과장(34)은 대뜸 “할 말이 많은 한 해였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이른바 ‘유턴(U-turn)족.’ LG-EDS에서 회사 비전 수립업무를 맡았던 박과장은 만 4개월간의 ‘외도’ 끝에 지난 9월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올 4월 부푼 꿈을 안고 택한 업체는 ITS(지능형 교통정보 시스템) 기술개발 및 서비스를 담당하는 한 벤처기업. 도로 교통상황 정보수집과 관련된 ITS 기술의 희소성이 그를 끌어당겼다. 펀딩도 적잖게 받은 상태여서 오랜 대학선배인 사장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대박 꿈은 누구나 꾼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수나 스톡옵션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실제 내 손으로 하나의 비즈니스 사이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과 벤처 붐이란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안정된 직장을 버려야 하는 갈등이 적잖아 반년 동안 아내(32)와 상의도 해봤지만 ‘장밋빛 미래’를 향한 꿈이 늘상 현실을 앞섰다. 무보수로 버틸 각오로 1년치 생활비도 미리 준비해뒀다.

직원이 20여명 남짓한 이 업체에서 박과장에게 주어진 일은 기획업무. 벤처답게 평일 퇴근시각은 아무리 빨라도 밤 10시. 토-일요일도 없을 정도로 라이프 사이클이 크게 변해 가족 대소사도 뒷전이었다. 사업설명회나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는 밤샘도 일쑤. 덕분에 체중이 8kg나 줄고 하루 한갑 피우던 담배도 두갑으로 늘었다.

박과장과 같은 대기업 직원들의 벤처행은 사실 올 상반기 유행병처럼 번졌다. ‘신호탄’을 올린 건 대기업 계열의 SI(시스템통합)업체 직원들. LG-EDS의 경우 지난해 말부터 올 상반기까지 기술개발인력을 포함해 500여명이 벤처로 떠났다. 전직원 4000여명 중 무려 8분의 1에 해당한다. 삼성SDS에서도 500여명 이상이 빠져나갔다. 다른 SI업체의 경우도 전 직원의 10∼20% 가량이 닷컴 열풍에 휘말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IT전문 헤드헌팅업체 ‘드림서어치’의 박진호 기획실장(33)은 “지난 10월 닷컴기업 구조조정이 피크를 이룬 이후 대거 쏟아져 나온 벤처인력의 구직 문의가 최근 쇄도하고 있다”며 “구조조정이 내년 2월까지 이어질 전망이어서 구직 의뢰가 예전보다 배나 늘었지만 구인은 30%나 줄었다”고 밝힌다. 닷컴행을 택했던 상당수 인력들이 잠재적 실업상태이거나 비교적 보수가 높고 안정적인 외국인 회사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인력수요가 높은 기술인력의 유턴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렇다면 H대 공대 출신인 박과장은 왜 ‘원점’으로 돌아왔을까.

“조직문화에 크게 회의가 들었다. 사실 기술력은 전문가들도 인정할 만큼 독창적이었다. 급조된 벤처가 아니라 3년 전부터 노하우를 쌓은 업체라 TV 메인뉴스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박과장은 “내가 놀 ‘물’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책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일을 효율적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문 전형적인 ‘연구개발형’ 벤처였다는 것. 경영마인드 부재로 벤처 특유의 시너지효과가 없었던 탓이다.

“직원들에게 업무재량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CEO(최고경영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술력 하나만 믿고 대주주와 CFO(재무담당이사)를 겸해 독단적인 일처리로 일관하니 일이 되겠는가.” 그는 결국 ‘역(逆)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옛 직장상사의 권유로 LG-EDS에 재입사한 그에게 예전과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소속이 경영혁신팀에서 기술대학원으로 바뀌었을 뿐 연봉과 직급은 똑같다. 동료들도 그를 기꺼이 맞아주어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거품 빠진 초라한 닷컴, 그래도 '신경제의 엔진'
“가족으로부터 ‘이젠 좀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가끔 듣는다. 그렇지만 ‘벤처에서 보낸 한 철’이 전혀 헛된 것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박과장은 ‘순식간에 맺는 열매는 없다’는 통속적인 진리(?)와 함께 “모든 비즈니스가 기업 구성원들의 공동 작업이며 고객의 관점에서 비즈니스를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덕분에 그에겐, 벤처가 성공하려면 꿈과 열정으로 기술력을 구현한 뒤 어느 정도 회사로서의 외형이 갖춰지면 제2창업을 통해 오너가 경영에서만큼은 손을 떼야 한다는 자신만의 ‘벤처 철학’도 생겼다.

2000년 12월 현재 조정기를 거치며 자금난을 겪는 닷컴기업과 벤처들은 ‘버티기’를 위한 동면에 들어간 상태. 지난해 말부터 올 상반기까지 전략없는 투자와 광고에 수십억원씩 쏟아부은 ‘살아남은 닷컴의 슬픔’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이는 금년 하반기 경제가 다시 침체되기 이전부터 가열됐던 닷컴기업의 수익모델 논쟁을 ‘경보음’으로 여기지 않고 무대책으로 일관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다.

㈜아이월드네트워킹 홍보담당 박정은 대리(28)는 “지난 5월만 해도 닷컴기업들은 펀딩을 받기 위한 IR(회사설명회)에 광적으로 집착했다”며 “그러나 최근엔 사업방향을 전환하거나 M&A(인수-합병), 분사 등을 모색하고 합작회사 설립과 현지 업체와의 제휴를 위해 해외로 눈돌리는 업체들이 부쩍 늘었다”고 밝힌다.

굴곡진 터널을 지나 안착한 박과장과 달리 ㈜파수닷컴(www.fasoo.com) 마케팅실 강형석 차장(32)은 ‘닷컴은 살아 있다’는 소신으로 뒤늦게 닷컴세상에 뛰어든 케이스. 그는 대기업 출신 IT인력의 유턴이 피크를 이룬 지난 5월 홀연히 닷컴으로 진로를 바꿨다.

파수닷컴(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음악, 영상, 게임, 출판, 소프트웨어, 사업정보 등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에 대한 관리와 사용료 자동 부과 및 결제업무를 온라인상에서 일괄 처리하는 DRM서비스를 지난 7월 개시한 업체. 삼성SDS 사내벤처 3호로 시작해 올해 6월 분사 후 독립법인으로 설립됐다.

강차장은 왜 뒤늦게 ‘모험’을 택했을까. 그는 “독자개발에 성공한 기술력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점에선 박과장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는 전직 계기도 그렇고 친한 선배의 제의에 의한 입사 경로도 비슷하다. 하지만 강차장에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바로 DRM기술의 수익모델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많은 닷컴기업이 작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기업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튼튼한 수익구조다.”

파수닷컴의 경우 이미 대기업에서 한번쯤 검증된 인력들이 포진해 목표의식이 뚜렷했고 경쟁업체도 없어 서비스 개시와 동시에 수익이 발생했다. 벤처기업이지만 임직원 수가 46명에 이르고 삼성 출신이 많아 벤처식 조직 구성과 운영에다 대기업 조직문화가 조화된 특이한 형태도 그에겐 장점으로 받아들여졌다.

강차장의 전 직장은 영국계 영화 직배사.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그는 요즘 자기계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인문계 출신이라 입사 초기 다른 직원에 비해 소위 ‘IT지수’가 낮아 ‘적응상의 애로’는 있었지만 좋아하는 마케팅 업무를 한다는 생각에 업무 만족도는 높다. DRM 분야의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 인터트러스트사와의 협력관계를 위해 퇴근 후 영작문 공부에도 열심이다.

생활비도 못 대주는 상당수 벤처와 달리 파수닷컴에서 받는 그의 연봉은 옛 직장과 비슷한 수준. 예전의 ‘칼퇴근’엔 못 미치지만 주 5일 근무조건도 옛 직장과 그대로다. 오후 6시 퇴근 후 주 3회 가량 술자리를 갖던 버릇도 없어져 건강도 좋아졌다.

“파수닷컴에선 모든 직원이 그날그날의 매출상황을 사내 네트워크를 통해 언제든 조회할 수 있다. 닷컴기업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런 투명 경영이다.” 강차장은 벤처의 ‘초심’을 지키는 닷컴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전망한다. 냉정한 기업분석을 통해 닷컴을 직장으로 선택할 경우 ‘탁월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입사 전 경제지 기자 출신으로 2년 전 닷컴기업으로 옮긴 남동생(30)에게 꼼꼼한 자문도 구했다.

그러나 강차장도 장기국면에 접어든 닷컴 위기로부터 자유롭진 않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검색포털업체에 있는 후배의 말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양주에 샤워 한번 하자’던 농담이 ‘요즘 형 회사는 괜찮아?’라는 진담으로 바뀌었다.”

그에겐 요즘 테헤란밸리의 빌딩주들이 빈 사무실이 나도 닷컴기업에는 임대해 주지 않을 정도로 닷컴기업의 신뢰가 떨어진 것이 안타깝다. 건전한 벤처가 클 수 있는 토양 마련이 그만큼 더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 닷컴 열풍이 한창이던 때 임대료를 주식으로도 받던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인 셈이다.

강차장과 박과장의 사례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닷컴 열풍의 공과를 적절히 시사한다. 한 사람은 뒤늦게 닷컴행을 택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오프라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한 무엇일까.

사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갭은 의외로 평행선을 긋지 않는다. 그들의 시각은 닷컴기업이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경제성장의 엔진이 되지 못했다는 반성 속에 스며든 벤처의 ‘부도덕성’과 ‘가능성’ 사이에 공존한다. 검증된 전문인력이 경영상의 미숙을 떨치고 ‘돈먹는 닷컴’을 위한 무분별한 외자도입, 인수-합병, 문어발식 확장 등을 일삼지만 않는다면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얼마든지 닷컴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대변하는 것이다.

내년에도 분할과 흡수, 통합을 통한 닷컴기업의 이합집산은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아직도 1, 2년 만에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머니 게임’의 망령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12월 초 한 대학생이 사업계획서를 들고 와 검토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계획서를 끝까지 읽어본 나는 기가 막혔다. 사업 아이템 개발`→`회사 구성`→`사업계획서 작성`→`회사설명회`→`투자 유치`→`코스닥 등록`→`뻥튀기로 이어지는 사업흐름의 마지막 단계는 ‘회사 매각’이었다.” 한 벤처기업인의 토로다.

‘닷컴 코리아’는 한낱 허망한 꿈일까. 한바탕 ‘잔치’를 끝낸 닷컴기업과 닷컴인들은 2001년 벌어질 ‘제2라운드’를 앞두고 ‘제자리 찾기’를 위한 현명한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주간동아 2000.12.28 265호 (p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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