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

의주 상인 임상옥의 성공스토리

  • 입력2005-06-01 11: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최인호의 ‘상도’(商道)가 한국일보 연재소설이 아니었다면, 또 책이 나오자마자 매스컴이 앞다퉈 최초로 조선후기 거상 ‘임상옥’을 재조명한 소설이라고 떠들지만 않았다면, 책 읽기는 훨씬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 미리 제공된 정보가 오히려 소설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김기섭 회장-석전 선생-거상 임상옥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저자는 추리기법으로 풀어가려 했지만, 독자에게는 답이 뻔한 문제를 푸는 것처럼 싱겁다. 김기섭 회장은 임상옥의 존재를 처음 알려주고 석전 선생은 거기에 토를 달아주는 단순 전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도’의 1권 3분의 1 분량을 차지하는 김기섭 회장과 석전 선생 이야기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읽다보면 ‘본론(임상옥 이야기)은 언제 나오지’하며 자꾸 책의 뒷장을 들추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건은 기평그룹 김기섭 회장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연히 시점도 임상옥이 활약하던 1800년대가 아닌 20세기 마지막 성탄절 전야로 설정돼 있다. ‘굴러가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별명이 바퀴벌레였던 김회장이 독일 아우토반에서 암호명 E-카로 불리는 신차의 시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유품인 지갑에서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한자가 적힌 쪽지가 나온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회사측으로부터 그 쪽지의 의미를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학자 석전 선생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글의 주인공이 150년 전 죽은 의주 상인 ‘임상옥’임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본론에 해당되는 임상옥의 생애 부분은 김정희, 홍경래와 같은 역사 인물이 등장하고 각종 사료가 인용되는 등 본격 역사소설의 모양새를 갖춰 보다 흥미진진하다.



    의주 태생의 임상옥은 사신행렬을 따라 중국 연경을 드나들며 인삼을 밀매하던 임봉핵의 아들로 태어났다(1779~1855년). 그러나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종살이를 하다 그 자신도 인삼 장수로 나선다. 첫번째 홍삼 장사로 큰 돈을 번 그는, 사창가에 팔려온 장미령을 사서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지만 자신은 공금유용죄로 ‘상계’에서 파문당한다. 스무살 남짓한 임상옥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임봉핵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상도의 제1원칙을 ‘商卽人’(상즉인)’이라 했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라는 것. 장미령의 몸을 사서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것도 ‘이(利)를 남기기보다 의(義)를 좇으라’는 상도를 지킨 것이었다.

    그 후 승려가 된 임상옥은 고관대작의 첩이 된 장미령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환속을 결심하는데 이때 석숭스님이 ‘죽을 사(死)’자와 ‘솥 정(鼎)’, 가득 채우면 없어지고 오직 팔 할쯤 채워야 온전한 ‘계영배’(戒盈盃) 이렇게 세 가지 비결을 내려준다.

    중국 상인들이 인삼불매 동맹을 맺고 장사를 방해하자 스스로 인삼을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물리친 것이 ‘死’의 비결이요, 다른 상인들이 홍경래와 손을 잡았을 때 그만은 ‘鼎’의 비결로 홍경래의 유혹을 물리치고 혁명의 와중에도 목숨을 부지한다. 마지막으로 ‘계영배’를 통해 자족(自足)이야말로 최고의 상도(商道)임을 깨달은 그는, 자신에게 빚을 진 상인들을 모두 불러 빚을 탕감해주고 금덩어리까지 들려 보낸다. 개성상인 박종일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차피 빚이란 것도 물에 불과한 것.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받을 빚이요 갚을 빚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나 또한 상인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가 기업인들로부터 “우리나라에 본받을 만한 역사적인 상인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구상을 시작했다는 이 소설이 왜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택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부분은 다시 현대로 돌아와 김기섭 회장의 기념관 개관식이 열리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나’는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과 전설 속의 술잔 ‘계영배’가 전시돼 있는 것을 본 뒤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쓴 발문을 천천히 읽고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상도’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굳이 ‘나’란 화자를 빌려 저자가 나서지 않아도 임상옥의 삶 자체가 ‘상도’이지 않은가. 5권으로 된 이 소설에서 김회장 부분은 자꾸 사족(蛇足)처럼 느껴진다.

    최인호 지음/ 여백 펴냄/ 전 5권/ 각 7500원



    화제의 책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