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0

2000.11.23

국정원에 체포된 ‘김정일의 통일전략’

출판사 대표 ‘회합`-`통신’ 위반 혐의…국정원 수사 ‘잘해야 본전’일 듯

  • 입력2005-05-30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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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에 체포된 ‘김정일의 통일전략’
    국가정보원이 ‘김정일의 통일전략’을 긴급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은 11월8일 오후 5시30분께 일련의 북한 관련 서적을 출판해온 ‘도서출판 살림터’의 송영현 대표(41·서울시 마포구 망원2동)를 자택에서 긴급 체포했다. 송씨의 아내 장청화씨(37)에 따르면, 이날 국정원 수사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6명의 직원이 갑작스레 들이닥쳐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며 송씨를 연행하고 집과 집 근처의 출판사를 뒤져 출판물과 북한 원전, 컴퓨터 등을 압수해 갔다.

    국정원 대공수사국 관계자에 따르면, 송씨에 대한 영장 기재상의 범죄혐의는 국가보안법 제7조(이적표현물 제작-소지-반포 등) 및 제8조(회합-통신 등) 위반혐의다. 요즘 남북관계에 비추어 다소 ‘이례적’인 조처다. 국정원 수사국은 국가보안법상의 단순 이적표현물 및 고무-찬양 사건에 대해서 손을 뗀 지 오래다. 간첩-조직 사건을 제외한 단순 사건의 수사는 경찰에 미뤄왔다.

    언뜻 보면 이 사건은 단순하다. 송씨는 출판사를 차린 90년부터 ‘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연구’ ‘벗’ ‘쇠찌르레기’ 같은 북한 문학`-`소설을 주로 출간해 왔으며 지난 94년에는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저자 홍정자) 출판과 관련해 구속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난 바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책은 지난 6월 송씨가 출판한 ‘김정일의 통일전략’(저자 김명철)이다. 그런데 바로 이점 때문에 이번 사건은 간단치가 않을 것 같다.

    재일교포 2세인 김명철씨(56)는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 학계와 일본에서는 군사`-`외교평론가로 꽤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 ‘피플스 코리아’ 기자 출신인 김씨는 거의 독학으로 북한 외교 및 한반도 문제를 공부해 나름대로 일가견을 갖고 있는 평론가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피터 헤이즈가 운영하고 있는 노틸러스연구소의 인터넷 토론장인 평화정책토론(Peace Policy Forum)에 논문을 발표해 왔으며 99년에 일문판 저서 ‘한국붕괴:김정일의 군사전략’(도쿄 고진샤)을 내기도 했다. 이 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전략전술을 잘 드러내고 북한 체제를 가장 잘 이해한 책’이라고 호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바로 ‘김정일의 통일전략’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판권 소유자인 재미교포 송학삼씨(뉴욕 민족통일학교 교장)가 북한 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해온 송씨에게 “이 책을 남한 독자에게 소개하면 좋겠다”고 제의한 것은 99년 봄. 장씨에 따르면 당시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아 송씨가 이를 고사했고, 그 뒤로 송교장이 “인세를 받지 않고 책의 일부를 사주겠다”고 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5000부쯤 발행했다. 이를 계기로 송씨는 지난 10월 상순 평양 가는 길에 서울에 들른 송교장을 만나 북한측과 정식 계약을 맺어 북한 서적을 출판하는 문제를 상의했고, 송교장은 평양에서 10여일 체류하고 10월 말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러 그 문제를 다시 논의했다.



    11월10일 남편을 면회한 장씨에 따르면 국정원이 추궁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친북 인사’인 송교장이 ‘김정일을 미화하는 이적표현물’을 한국에서 출간할 목적으로 송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만나(회합`-`통신) 출판 비용의 일부를 부담(200만원 금품수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국정원 수사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만일 국정원의 구도대로 송교장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면 서울∼평양∼서울에 들른 ‘간첩’은 잡지 않고 간첩인 줄 모르고 접촉한 송씨만 다그친 꼴이다. 또 송씨가 단순한 ‘친북 인사’라면 회합`-`통신죄가 성립할지 의문이다(송교장은 기자에게 자신은 원래 ‘운동권’이 아니었는데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미국 이민을 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진 뒤로 ‘친북 인사’로 규정되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영장에는 ‘최소한의 범죄혐의’만 기재하기 때문에 법률 적용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혐의로 보면 아무래도 국정원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 이적표현물 출판으로 걸기에는 부담이 따르는 사건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 책에 대해 자신의 전략전술을 잘 드러낸 책이라고 호평한 것에 비추어 북한 당국은 이번 사건을 한 출판사 대표의 체포가 아닌 국정원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에 대한 체포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쯤 되면 국정원은 ‘잘해야 본전’이거나 ‘사소한 일에 목숨 건’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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