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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벤처엔 이유가 있다

마구 돈 끌어다 무리한 사업확장 ‘순식간에 와르르’…“KDL 다음 어디냐” 초읽기

몰락하는 벤처엔 이유가 있다

몰락하는 벤처엔 이유가 있다
‘몰락하는 벤처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벤처 위기론의 암운이 걷히지 않고 있던 한국 벤처업계에 치명타를 날린 정현준 사장의 한국디지털라인(KDL)이 단기간에 사업을 확장해온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교과서적 정의를 따르자면 벤처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껏해야 성공 확률을 5% 안팎으로 잡고 있는 것이 벤처기업의 속성인 터에 벤처의 몰락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디지털라인처럼 날로 번창하던 벤처기업이 ‘일시에’ 무너진 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잠복해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은 정현준 사장이 어려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디지털라인 때문이 아니라 평창정보통신에 손을 대면서부터라고 한다. 95년 설립된, 한국디지털라인의 전신인 웹인터내셔널은 이미 시장에서 국내 최초로 스톡옵션을 도입하고 최단 기간에 코스닥에 등록한 업체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부자금이 사업확장 지렛대 역할



그러나 정현준 사장은 웹인터내셔널의 주가가 급상승하자 이를 바탕으로 시중의 사채자금을 끌어들여 무리한 사업 확장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평창정보통신. 평창정보통신은 검색엔진으로 유명한 알타비스타의 한국내 라이선스업체다. 결국 이 평창정보통신으로 인해 정사장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소액주주들로부터 주식을 공개매수해 놓고 대금을 입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고발당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관계 로비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벤처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상황에서 정씨와 같은 벤처기업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무모한 ‘확장주의’가 비단 정씨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극심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벤처의 신화’ 메디슨 같은 경우도 위기의 배경에는 무리한 확장, 특히 관련사에 대한 과도한 출자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메디슨은 한글과 컴퓨터(한컴) 부도 이후 한컴을 살리기 위한 국민 캠페인이 벌어질 때 이민화 회장의 결단으로 50억원을 출자했고 대표적 벤처캐피털인 무한기술투자에도 출자해 대주주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메디슨 내부 관계자들조차 심하게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디슨은 이에 대해 ‘문어발 확장’이 아닌 ‘관련 다각화 전략’일 뿐이라며 해명하고 있지만 시장 분석가들은 메디슨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메디슨은 이미 수입부품 비중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장래성이 없다”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 벤처의 상징이라고 하는 메디슨 역시 한컴을 이용해 재테크에만 열중한 것이 사실 아니냐”고 되물었다.

메디슨은 지난 6월 기업어음(CP) 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지는 등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다급하게 관련 회사 지분 매각 등을 통해 유동성 확보에 발벗고 나섰다. 특히 11월말까지 돌아오는 단기차입금 1700억원이 제대로 롤오버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무리한 사업 확장은 결국 메디슨의 업보로 돌아와 최근 무한기술투자 지분 22.8%를 이미 웰컴기술금융에 팔아넘겼고 한컴 지분은 매각 협상을 진행중이지만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메디슨뿐만 아니라 삼보컴퓨터, 다우기술 등 대부분의 벤처지주회사들 역시 이러한 지적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은 형편이다. 이들 일부 1세대 벤처기업에 대해 ‘재벌식 확장’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쏠렸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톨릭대 이동현 교수(경영학)는 “문제는 확장 그 자체가 아니라 기존 사업과 관련해서 더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 초기 벤처의 사업 확장 전략에는 정부가 국민 세금을 동원한 정책 자금이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점도 적지 않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벤처 육성 초기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에 사업계획서 하나만 제출하면 5억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끌어다 쓸 수 있는 상황을 조장해 ‘정책적으로’ 밀어붙인 정부의 잘못도 지적되어야 한다는 것. 흘러넘치는 자금 탓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던 창투회사들도 코스닥시장의 침체 이후 절반 이상이 간판을 내렸다.

우리기술투자 관계자는 “벤처를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원천 기술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고 기업 심사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돈보따리만 갖고 ‘창업투자회사’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벤처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즈니스 모델 측면에서 보자면 오프라인 기업의 온라인 진출, 그리고 온라인 기업의 오프라인 인수를 유기적으로 이뤄내지 못한 벤처기업들은 침체나 몰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사업 진출에 실패하는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사업 모델은 갖추지 못한 채 ‘구색맞추기’용으로 온라인 분야를 신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동현 교수는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업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막연한 환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온-오프라인 병행을 통해 어떤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온라인 사업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개발이 아니라 단순한 머니게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영자들일수록 온라인 분야의 분사에만 급급해 사업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쇼핑몰의 원조격인 인터파크도 가장 먼저 오프라인 분야로 진출해 도서 유통 중심의 전자상거래 멀티숍을 개설했지만 그 숫자는 초기 21개에서 현재 5개로 줄어들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 인터파크 관계자는 “초기 투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인터넷비즈니스의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닥시장의 침체로 자금 여력이 없는 온라인기업 입장에서 오프라인 매장 구축에 들어가는 투자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모으는 실험은 역시 최근 오프라인 서점 골드북을 인수한 온라인 서적상 와우북의 진로다. 와우북은 19억원을 투자해 골드북의 지분을 인수하고 골드북 경영진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결권 25.5%도 넘겨받았다.

애초 컴퓨터 서적 전문 소규모 쇼핑몰로 출발했던 와우북은 오프라인서점을 인수함으로써 골드북이 보라매공원 근처에 보유하고 있던 대형 도서매장과 12개의 전국 서점 체인망뿐만 아니라 도서 데이터베이스까지 확보했다.

물론 아직까지 온-오프라인 통합 모델과 관련해 시장에서 나오는 전망은 그리 밝지 않은 형편이다. 인터파크 정일헌 마케팅팀장은 “기존의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최근 들어 온라인 쇼핑몰을 만드는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신세계백화점 계열의 이마트 등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온라인 쇼핑몰 작업 등에도 회의적 견해를 드러냈다.

코스닥 침체로 온라인기업 자금난 가중

인터넷 마케팅랩인 ㈜이비즈홀딩스 정사동 부사장은 “앞으로는 자금 여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오프라인 기업들이 부실한 온라인기업을 인수해서 오프라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현재 단계에서 온라인기업이 오프라인기업의 ‘보완재’는 될 수 있지만 독자적인 ‘대체재’는 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메디슨의 이민화 회장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이른바 ‘뉴하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국 벤처업계가 세계무대에서 성공하는 열쇠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민화 회장 자신이 운영하는 메디슨이 초음파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형’ 제품 생산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회장의 지적은 최근의 ‘닷컴거품론’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닷컴기업의 몰락이 한국 벤처의 토양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사동 부사장은 “벤처가 문자 그대로 ‘고위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정현준 사건은 우리나라의 벤처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간동아 2000.11.09 258호 (p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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