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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걷니? 난 타고 다닌다!

‘킥 보드’ 거리 점령 … 실용적·재미 맞물려 인기 고속질주

아직도 걷니? 난 타고 다닌다!

아직도 걷니? 난 타고 다닌다!
요즘 젊은이들은 걷지 않고 탄다?

거리를 ‘타는’ 젊은이들이 시내를 점령하고 있다. 비교적 오랜 관록을 자랑하는 ‘스케이트 보드’에 이어 90년대 ‘인라인 스케이트(롤러 블레이드)’가 대열에 합류하더니 최근에는 곳곳에 ‘킥 보드’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과 청소년 일색이다.

이처럼 ‘타는 문화’가 유행의 대표적인 코드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왜 ‘걷지 않고 타는’ 것일까.

“우선은 재밌죠, 그 다음은 뽀대(폼, 멋)!” 보드를 즐기는 이유를 묻자 연세대 동아리 ‘판타지’의 멤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실용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주위의 시선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 “애들이 모두 타고 다닌다면 그땐 다른 걸 찾겠죠. 유행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을 즐기는 거예요.”

‘유행을 선도하고 싶다’는 젊은 층의 심리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역시 마케팅 분야. 미국의 스포츠전문채널 ESPN이 ‘X-Game’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스포츠를 브랜드화하는데 처음 성공한 이후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광고에 응용하고 있다. 국내 시장 역시 빠르게 열리고 있는 상태여서 지난 10월3일에는 한 의류업체와 미디어회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국내 최대규모의 행사가 여의도 공원에서 열리기도 했다. 현장에서 동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때와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야구나 축구처럼 여러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구요. 마음만 내키면 한밤중에라도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죠” “새로운 기술을 마스터했을 때의 그 성취감은 다른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걸요.” 3년째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백발 청년’ 한주영씨(64)는 건강에 좋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작하고 나서 무릎이 많이 좋아졌어요. 폐활량이나 유연성도 나아졌지요.”

인라인 스케이트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인 EspKorea의 전상철 기획팀장은 “스포츠와 놀이의 장점만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라고 설명한다. 몸 생각해서 억지로 뛰어다니는 운동이 아니라 재미를 즐기다보니 자연스레 건강까지 따라온다는 것.

그런가 하면 출근시간대 지하철에서 만난 노형중씨(29)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킥 보드를 타는 케이스다. 용산의 한 컴퓨터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편한 남방에 배낭을 멘 전형적인 벤처족(族). “집에서 역까지, 혹은 환승할 때 절약되는 시간이 꽤 있죠. 물론 바쁜 생활 사이사이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구요.” 예전에는 인라인 스케이트로 출퇴근을 시도해봤지만 계단이 많아 어려웠다고 설명한다. 킥 보드가 재미는 적지만 더 유용하다는 것.

그러나 실용성과 재미 이외에 다른 요인이 더 강하다는 견해도 있다. 국내에 킥 보드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도쿄 사이트’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외국 문화를 수용 혹은 모방하고자 하는 심리가 더욱 클 수 있다는 것이다. “킥 보드의 경우 일본과 거의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상품들 대부분이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상륙한다는 것은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다.” 특히 이들은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화가 종래의 미국 편향에서 벗어나 일본이나 홍콩 등 주변국가에 서서히 동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에서는 장난감에 불과한 킥 보드가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만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고 있는 것은 그 유력한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황상민 교수(연세대 심리학전공)는 반론을 펼친다. 킥 보드는 다른 ‘탈 것’들과 범주가 다르다는 것. 스케이트 보드나 인라인 스케이트의 경우는 M-TV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 소비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킥 보드 열풍은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킥 보드를 타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울과 도쿄에서의 동시 유행은 오히려 좁은 골목과 놀이공간 부족이라는 도시 구조의 유사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그럼 킥 보드가 이전의 스케이트 보드보다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교수는 “애초에는 20대가 시작한 킥 보드 문화지만 초등학생들이 주소비층이 되면서 지금과 같은 열기를 띠게 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20대에서의 유행 메커니즘과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이의 유행 메커니즘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 20대의 유행은 이미지 소비 혹은 ‘힙합문화’ 같은 상징성의 소비지만, 10대 초반의 유행에는 ‘또래 내에서의 유달리 강한 집단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주변 아이들이 다들 타니까 같이 놀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러네요” “유행이잖아요.” 휴일을 맞아 가족 전체가 놀러 나온 문희정씨(33·인천시 부개동) 모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가족도 마찬가지 반응.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없으면 못견디는 거예요.” 타지 않으면 혹은 사주지 않으면 ‘왕따’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킥 보드 열풍의 한 요인임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또래 집단’ 혹은 ‘또래 문화’에서의 소외를 걱정하는 부모 심리가 킥 보드 열풍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

그러나 킥 보드 열풍의 저변에는 점점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심리가 깔려 있을 수도 있다. 뒤처지기 싫어하고 앞서 나가기 좋아하는, 혹은 속도감 그 자체가 해방의 매개로 작용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가 이처럼 ‘빠른 탈 것’의 놀이 문화를 촉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림픽 공원에서 여유롭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던 대기업 직원 김재겸씨(27). “유행이 지나 남들이 아무도 안탄다면 저 혼자서는 좀 쑥스럽겠죠. 언젠가는 싫증나서 집구석에 처박아두게 될 거구요.” 그렇지만 아깝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란다. “당분간이라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유행 자체에 대해 좋고 나쁨을 말한다는 게 무의미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정말 자기 스스로가 좋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휩쓸려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도심을 가로지르는 ‘탈 것’ 대열에 동참할 것인지 혹은 자녀에게 킥 보드를 사주어야 하는지 고민중인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성영신 교수(고려대 심리학과)의 조언이다.



주간동아 2000.10.19 255호 (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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