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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한국인’의 답답한 살림 걱정

새천년 가을 김일섭씨가 본 요즘 세상…“IMF 이후 나아진 것 없다”

‘평균 한국인’의 답답한 살림 걱정

‘평균 한국인’의 답답한 살림 걱정
98년 1월 보험회사 과장 김일섭씨(당시 39)는 국가 공인 ‘평균 한국인’으로 뽑혔다. 전업주부인 아내 구정례씨(당시 38)와 월 평균 220만원 가량의 소득에 25평짜리 내 집(서울 마포구 공덕동 현대아파트)에 살며, 참이 (현재 초등학교 5학년) 하늘이(현재 3학년)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게 통계청이 그를 평균 한국인으로 선정한 이유였다.

98년 1월 통계청이 집계한 평균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 30대 후반의 가장으로 가구 당 3.3명, 24.4평 규모의 내 집에서 월 평균 215만원을 벌어 자녀 사교육비로 월 14만1000원 정도를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한국인으로 뽑힌 지 한 달 뒤 김대중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김일섭씨는 “경제난이 확산돼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예측 가능한 정치로 서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바란다”며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고, 아내 구정례씨도 “아무리 줄이고 아껴도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를 감당하기 어렵다. 두 아들에게 과외를 시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며 주부로서의 소망을 밝힌 바 있다.

2년 반 후인 지금도 김일섭씨는 ‘평균 한국인’일까. 30대 후반이었던 나이가 40대에 접어들었고, 그 사이 두 차례 회사를 옮기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김씨 자신은 “그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소득도 늘지 않았고 집은 여전히 25평 아파트이며(평수를 늘리기 위해 열심히 청약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자동차(소나타III·동생이 할부금을 내지 못해 억지로 떠안았다고 한다)도 그대로다. 정체는 곧 후퇴인데 요즘은 평균에 좀 못 미치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올해 2분기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은 월 평균 233만1000원. 지난해에 비해 10.9% 증가한 것이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소득은 193만9000원으로 외환위기 이전인 96년 194만7000원에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살림살이는 3년 전(IMF 이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는 뜻이다.



김씨 부부는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체감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날마다 유가(油價) 급등을 걱정해야 하고, ‘제2의 IMF위기설’이 떠도는 등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이 3년 전과 너무 비슷하다. 아내 구씨 역시 “알뜰살뜰 살아도 뛰는 물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동기생 중 가장 빠른 승진을 하며 잘나가던 김씨가 생명보험회사를 그만둔 것은 99년 초. 한국 사회는 IMF 구제금융의 쇼크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잔뜩 허리띠를 졸라맨 회사가 과장급 300명에게 대기발령을 내 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했다. 그런 와중에 김씨의 사표는 “돌아서면 후회할 바보짓”으로 여겨졌다. 그래도 경기가 풀리면서 일기 시작한 소자본 창업 붐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보험회사 영업맨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만큼 이제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몇몇 사람들과 창업 준비를 했는데 여의치 않아 코스닥 등록을 준비중인 닷컴 기업에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코스닥 등록이 물 건너가자 형편없는 연봉 대신 받은 스톡옵션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됐다. 다 던져버리고 한달 전 지금 회사로 옮겼다. 연봉 수준으로 보면 보험사에 계속 있는 것과 엇비슷할 것이다.”

재테크도 남들만큼은,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정보를 얻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결과는 “남는 게 없다”였다. 퇴직금 중 일부는 PC방 개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주식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요즘은 ‘장기투자이거니’ 생각하고 주식은 잊고 지낸다. 하필 그가 산 종목이 ‘대우중공업’이었다. 나머지도 초기 투자 가격의 절반 혹은 4분의 1만 남았다.

PC방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준비에 들어가기 직전 ‘만약’을 위해 먹고 살 준비로 마련했다. 총 1억원이 들었지만 동업이기 때문에 소요된 창업자금은 5000만원. 아내 명의로 가게를 내면서 중소기업청이 운용하는 저리의 소상공인 창업자금 3000만원을 대출받고, 퇴직금 일부와 친척으로부터 빌린 돈까지 보태 5000만원을 만들었다.

“신촌 대학가 골목에 있는 점포인데 창업 당시 IMF위기 끝물이라 임대료가 무척 쌌고 그때만 해도 그 일대의 유일한 PC방이었다. 그래서 개업 두 달간은 벌이가 상당히 좋았다. 반씩 갈라도 월 300만~400만원씩 남았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자 파리 날리던 당구장이나 다른 점포들이 모두 PC방으로 바뀌더니 금세 열세곳으로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졌다. 요즘은 임대료 내고 대출받은 것 갚고 나면 푼돈 정도 남는다. 2년쯤 지나 PC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손해는 안 봤지만 그렇다고 돈을 벌지도 못했다.”

닷컴 기업에 대한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주식은 반토막이 나고, PC방 개업도 막차를 타는 바람에 번번이 재테크로는 재미를 보지 못한 김씨. 그는 “위험을 감수할 줄 모르고 남들이 잘 된다는 것만 따라하는, 어쩔 수 없는 봉급쟁이 기질 탓”으로 돌렸다.

현재 김씨의 직함은 모 결혼정보회사 특별회원사업부 본부장이다. 종로구 국세청 건물 21층에 앉아 결혼정보회사 관리자의 눈으로 본 한국 사회는 매우 흥미롭다.

“결혼정보회사가 의약분업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면 의아할 사람이 많겠지만 두 집단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결혼정보회사의 최대 고객은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6만5000명 회원을 가진 의사협회의 비중이 대단히 높아 의료대란이 계속될수록 우리도 회원 확보에 어려움이 생긴다. 지금 여자 회원은 넘치고 남자 회원은 부족한 상황인데 그동안 대학을 졸업한 남자들이 취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혼도 미뤄졌다. 그들이 지금 취직과 거의 동시에 결혼을 준비한다. 작년부터 신입사원 채용이 조금씩 느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다시 경제위기가 닥치면 이 일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전 직장이 금융관련 업종인 관계로 김씨는 그쪽 사정에도 밝은 편. 그런데 요즘 들려오는 소식은 심상치가 않다. 일단 돈을 풀어야 하는 은행`-`보험사 등이 신규대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으며, 기업마다 자금담당 이사를 승진시키는 것도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다는 증거다. 기업에서 금리 금액 기간을 묻지 않고 자금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김씨의 가슴도 철렁한다.

대형할인매장에서 960원 하는 고무장갑을 동네 재래시장에 가면 800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을 꼼꼼히 비교하는 ‘평균 한국인’의 아내 구정례씨. “요즘처럼 물가가 오르면 안 쓰고 안 먹어서 절약하고 발품 팔더라도 10원이라도 싼 것을 사는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말한다. 되도록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고 무릎꿇고 걸레질하며, 일주일에 빨래비누 1장씩 사용할 만큼 손빨래를 주로 하고, 식료품은 가급적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이웃과 공동구매하며, 외식은 사절, 적은 재료와 비용으로도 무슨 요리든 척척 해낼 줄 아는 구씨의 살림솜씨는 평균을 훨씬 넘는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니 빚 갚아가면서 매달 50만∼60만원씩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1년간 아이보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보태고, 직장에 묶인 남편 대신 중소기업박람회에서 제공한 창업연수를 받는 등 분주하게 지냈다. 그러나 아무리 알뜰한 구씨여도 도저히 줄일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아이들 교육비. 부근 공립초등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학교 교육에 드는 비용은 거의 없지만, 피아노 미술 영어 수학(결코 많이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등 두 아이의 사교육비만 매달 30여만원씩 들어간다. 연초 학원비가 일제히 올라 5만∼6만원의 추가비용이 들게 되자 필요할 때마다 과목을 번갈아가면서 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세워 더 이상 지출이 커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는 다른 집에서는 보통 사교육비가 월 50만원이 넘는다.

“공교육에 대해 큰 기대도 하지 않지만 최소한 영어나 예체능 과목만큼은 전담교사가 확보됐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수업 중에 단소배우기가 있는데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아이들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따로 학원에 가야 하고, 수영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제대로 해주지 않으니까 30만원씩 주고 개인레슨 받는 아이들이 나온다. 사교육비를 줄이려면 교육의 질이 높아야 하고, 그것은 교사의 질에 달렸다고 본다.”

아이들 교육문제를 놓고 김씨 부부가 의견일치를 본 것은 유학이다. 지금 당장 조기유학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여력이 없기 때문인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싶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만큼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크다.

끝으로 부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더니 아내 구씨는 “정치는 전혀 모른다”며 뒤로 빠졌고, 김씨는 차기 대통령에 대해 이런 희망사항을 피력했다.

“대선 때도 총선 때도 누가 더 정의로운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나마 사회운동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찍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경제를 아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란다. 경제신문 정도는 꼼꼼히 읽을 줄 아는 대통령, 경제에 대해 원칙을 지키는 대통령. 지금까지 남북통일 문제도 정치로 풀어왔지만 이젠 경제로 풀어야 할 때다. 다음 선거에서는 그런 인물을 뽑겠다.”





주간동아 2000.10.05 253호 (p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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