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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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검안(檢案) 기록은 민중의 목소리였다”

사망사건 진술 가감없이 정리한 ‘생생한 역사’ …생활 문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

  • 입력2005-06-21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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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검안(檢案) 기록은 민중의 목소리였다”
    유서를 쓰려고 하니 홍광(紅光)이 취지(聚之)하여 눈물이 솟아 (눈)동자를 가리니 엇지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 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아니하나 악명(惡名)을 입고 부명(父命)의 죽게 되니 엇지 절통하지 아니하리오. 또한 모녀간 상봉할가 하였더니 그도 못하고 홍서방도 다시 못보고 죽으니 엇지 구천지하에 간들 눈을 감으리오….’

    1899년 11월 충청도 서산에 살던 과부 유씨 부인은 마을에 자신을 둘러싼 추문이 돌자 통절한 뜻의 유서를 한 장 남기고 음독 자살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라남도 남원군에서는 여섯 살 난 남자아이가 문둥병 환자 가족에게 간을 내먹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살해된 아들의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아들의 원수를 갚는다며 문둥병 환자를 살해하고 말았다.

    한 마을에 수명이 목숨을 잃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자 동네 사람들 모두 쉬쉬하며 없던 일로 처리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수년이 지난 뒤 남원군수는 이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

    남원군수:너는 이여광과 형제간이라고 하니 네가 형이냐 동생이냐. 여광은 올해 나이가 몇 살이며 어떤 병이 있었느냐. 또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어떤 이에게 피살당했느냐. 네가 사건 직후 바로 관에 고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오히려 어찌해서 서로 공모하여 사건을 엄폐하려 하였느냐. 또 이군필 이판용 등이 연달아 죽어 한집에 상이 세 번으로 더욱 참혹한 일이니 여광 군필 판용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실직고하라.



    이우범:여광은 이 몸의 동생으로 올해 나이가 43세입니다.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김판술의 아들을 산속으로 끌고 가 배를 갈라 간을 내먹었다고 들었고 판술이가 아들의 복수를 한다며 여광을 잡아다가 배를 갈라 간을 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동생의 집에서 조금 멀어 이 변고를 들은 후 겁을 먹고 잠시 피했다가 사건이 일어난 날 친척들과 함께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김판술 집안과 저희 집안이 서로 의논하기를 ‘살인한 자가 죽었으니 더 이상 일을 확대할 필요가 없으므로 피차간에 합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는 동네사람들로 하여금 시신을 매장케 한 후 해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군필은 이 몸의 셋째동생으로 평소 문둥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번에 여광이 아이를 죽이고 간을 꺼낸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집을 나가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판용은 저의 사촌동생으로 역시 병자인데 겁을 먹고 병이 덧나서 병사하였습니다. 이상입니다.”

    도대체 이름도 알 수 없는 유씨 부인, 그리고 문둥병 환자의 엽기적인 유아 살해사건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란 고조선의 건국자 단군의 이야기이거나 삼국, 고려, 조선 왕조 임금들의 치적 등 왕조의 흥망성쇠이며, 조금 더 나은 경우에도 임금을 도와 충절의 역사를 수놓은 신하들의 이야기이거나 외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장군들의 공로 혹은 이른바 사상가들의 철학을 운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남을 만한 인물을 꼽는 데에도 마찬가지여서 세종이나 정조 혹은 이순신이나 허준 등과 같은, 무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을 지목할 뿐 아무도 한 장의 유서나 진술서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유씨부인이나 이군필을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은 ‘사료’의 경우도 보통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은 국가 기록이거나 혹은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는 개인 문집을 상기할 뿐 검안에 수록되어 있는 이씨의 진술 자료를 떠올리지 않는 데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씨 부인이나 다른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 내용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야담으로만 들었던 문둥병 환자의 이야기가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네 추문으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유씨 부인의 유서를 통해 죽음을 앞두면서까지 사위에게 술대접을 하려고 술상을 차려놓거나 3년상을 마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여성의 사회-문화적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건 조사에 참여한 여러 신분 및 성별을 지닌 사람들의 입을 통해 향촌 사회의 일상적 구조를 발견할 수도 있게 된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역사학계는 많은 선학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분야가 개척되었으며 연구의 심도 또한 매우 깊어졌다. 그동안 사료로 활용되지 못했던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재평가됨으로써 한국 역사의 새로운 상(像)을 집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래 20, 30년 동안 이루어진 사회사 연구의 활성화는 향촌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했으며 계속하여 사회의 미세한 생활 부분으로 연구의 눈길을 더해가고 있다. 이를 통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수많은 ‘유씨 부인’과 ‘김씨 아저씨’들을 위한 역사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이제 무대가 준비됐다면 실제 삶의 모습을 그려야 할 차례다.

    이러한 한국사 연구의 발전과정을 돌아보면, 근래 생활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여정의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재미 위주의 소재를 발굴해 생활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입문서를 만드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겪고 있긴 하지만, 머지않아 사회사의 연장선상에서 저술되는 깊이 있는 저작물들이 대량 출간되리라 생각한다. 생활사 혹은 문화사라는 새로운 역사학의 분야를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서구의 그것과 비교하거나 동일한 수준의 성과를 성급히 예측하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검안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 것인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고서 및 고문서 목록집인 ‘규장각한국본종합목록’에는 거의 600종에 달하는 검안류 자료가 기재되어 있다. 책 수로는 20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검안이란 검시문안(檢屍文案)의 줄임말로 조선시대에 사망한 사람의 시체 검사 소견서, 즉 법의학적 판결문인 시장(屍帳)을 포함하여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한 일체의 법정 조사 보고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인명(人命)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한 뒤 응답을 기록했으며 시체는 사건 발생 지역에 그대로 두고 검시하여 사인 분석에 참고하였다. 특히 살인의 실제 원인, 즉 칼에 찔려 죽은 것인지 독살인지 아니면 구타 등에 의한 사망인지를 구별하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피살체의 보존이 중시되었다. 여름철에는 시체가 부패하기 쉬우므로 빨리 1, 2차 검사(初-覆檢)를 끝내기 위하여 검시관의 출발과 도착 일정까지도 상세히 기록해두었으며 불가피하게 검시를 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인근 지역의 군수로 대신하게 하는 등 보조수단을 강구하였다. 혹 사건을 담당할 해당 군수 등이 사건 관련자와 친인척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검시 및 사건 조사를 행할 수 없도록 한 규정도 마련했다.

    살인사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각각 다른 조사관들이 두 번의 조사를 행하였다. 사건 해당지역의 군수인 1차 조사자(初檢官)는 2차 조사자(覆檢官·대개 인근지역의 군수 혹은 수령)에게 1차 조사 때의 사정을 누설하지 못하므로 복검관은 별도로 조사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상부에서는 1, 2차의 내용이 서로 부합하면 사건을 종결했으나 의심이 가는 경우 1, 2차와 또다른 인근 지역 수령을 선정해 3차 조사(三檢) 혹은 그 이상의 검사를 실시했다. 조사의 철저함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다섯 차례나 조사가 행해진 경우도 있었다.

    물론 검시는 현대 의학의 해부 방법이 아니라 신체의 외상을 주로 조사했다. 사인에 따라 각종 외상의 징후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 시체가 부패되어 검시할 수 없거나, 혹은 사대부 부녀자들의 경우처럼 시신을 두 번 욕보인다 하여 친인척에게 검시 거부를 요청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살인사건이 관청에 접수되면 사건 해당 지역의 조사관은 아전들을 대동하여 조사를 벌였다. 먼저 시체가 놓여 있는 장소를 세밀하게 묘사한 뒤, 시체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면서 시체의 상태를 기록하였다. 얼마나 자세하게 기록했던지 이것으로 19세기 복장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최종적으로 알몸이 된 시신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 ‘시장’(屍帳)인데 검안에 부록하거나 따로 묶어 보고하였다.

    다음으로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심문하고 이를 정리, 보고했는데 모든 심문과 진술을 아전들이 받아 기록했다. 특히 취조한 그대로를 적도록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녹음 기록과도 같은 이 취조 기록이야말로 검안 자료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많은 평민들과 부녀자들의 목소리가, 아전의 손을 빌리기는 했으나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중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자료로 검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민원서류격인 소지(所志) 혹은 민장(民狀) 자료 등도 전한다. 그렇지만 이들 자료는 모두 약술(略述)의 형태로 재정리됐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검안기록은 진술 자체를 그대로 적었으며 모두 구어(口語)로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어떠한 역사 자료보다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이다.

    그동안 사료를 남긴 계층을 생각하면 그것은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지배층의 역사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추어 검안은 여성의 목소리, 그것도 민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니 어찌 역사가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자는 검안과 같은 특수한 자료로 어떻게 일반적인 역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러나 ‘정상적 예외’라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특별한 곳에 평범한 일상이 깃들여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검안을 통해 그려지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폭력성과 음주문화와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 역사의 또다른 사실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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