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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총재가 ‘프로’가 되는 날은?

야당 총재 2년 ‘절반의 성공’…“여전한 아마추어” 비판에 “대권후보 입지 구축” 긍정론도

이회창 총재가 ‘프로’가 되는 날은?

이회창 총재가 ‘프로’가 되는 날은?
그동안 우리가 대정부 투쟁을 강력하게 하지 않아서 얻은 것이 없다는 대내외의 시각이 있다. 그러나 사실 얻은 것도 다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야당의원 빼내기에 대해 부산 마산 대구 구미 집회로 엄중히 경고했다. 옷 로비, 파업 유도 등을 맞아 끈질기게 노력해 특검제를 성사시켰다. (총선 전에) 1인2 표 제도에 반대해 관철시켰다.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강경투쟁으로 얻은 소득이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9월1일 의원총회에서 지난 시절의 대여투쟁을 회고하면서 그 성과를 자평했다. 안상수 의원이 이에 앞서 “야당이 야당답지 못하면 깔보이게 된다. 총재도 야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 않느냐. 명분 없이 회군해서 바보 취급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며 더욱 강경한 투쟁을 주문한 데 대한 일종의 답변이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이총재는 다음해인 1998년 8월31일 총재로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따라서 지난 8월 말은 그의 총재 취임 2주년이 되는 날.

2년 동안 야당을 이끈 이총재의 대여투쟁 기조는 강경론이다. 시기별로, 이슈별로 완급과 간만을 조절했지만 대체적인 기류는 강경 쪽이라는 데 정치권에선 이론이 없다. 특히 총재 취임 직후인 1998년 9월 초부터 1999년 8월 말까지, 즉 우연히도 검찰의 세풍사건 시작 및 종결과 맞아떨어지는 이 시기에 이총재는 극단적인 강경투쟁을 벌였다.

이총재는 자신이 총재로 취임한 2년 전의 전당대회 날 저녁 자신의 핵심 측근인 서상목 의원이 출국금지 조치를 당하는 등 세풍사건이 터지고, 한나라당식 표현대로 여권의 집요하고 다각적인 ‘야당파괴’ 작업이 옥죄어오자 초강경 대여투쟁을 결심하게 된다. 대선에서 패배해 정치적 무대를 상실했던 이총재는 이날로 재기의 발판과 근거지를 마련했고, 야당 총재로서의 입지 마련을 김대중 대통령과의 한판 승부로부터 출발하게 됐다.



이로부터 꼭 1년 후, 이총재는 1999년 8월 30일 열린 원내외 지구당위원장 연찬회에서 “지난 1년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모든 힘을 쏟느라 국정 경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고 자평했다. 여권의 ‘세풍사건’‘총풍사건’ 공세와 ‘의원 빼내기’ 등에 맞서 싸우느라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펼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사실 이총재의 대여 강경투쟁의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강력한 대권 후보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일각에서는 “여전히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평이 따르곤 한다. 산술적으로는 절반의 성공인 셈인데, 실제로 이총재의 ‘명운을 건’ 대여투쟁이 완전한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지적이다.

1998년 9월 초 ‘등원거부-장외투쟁’의 초강수를 계속 던져온 이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정기국회 등원을 전격 선언한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날 회견에 배석한 당직자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전날 의원총회 때만 해도 표적 사정과 야당의원 빼가기 등에 항의해 ‘정권퇴진’까지 들먹인 이총재가 등원을 선언하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총재는 당시 등원 결정 배경을 묻는 질문에 “추석을 계기로 국회가 더 이상 공전되지 않고 시급한 민생문제를 풀기 원하는 국민의 뜻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는 정확히 2년 뒤인 2000년 9월 현재 이총재가 벌이고 있는 ‘등원거부-장외투쟁’ 입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여권의 야당의원 빼가기 등에 맞서 ‘생존권적 몸부림을 쳤던’(이총재 자신의 표현) 당시보다 지금이 더 열악한 상황이라고 보기엔 미진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당시 “대여투쟁을 배가하기 위해 장외투쟁과 원내활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본다”는 논리를 동원했고, “국회 등원이 굴욕적인 것 아니냐”는 질문엔 분명한 어조로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2년 뒤 한나라당과 이총재는 또 등원 거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총재의 아마추어리즘은 그의 출신 성분과 정치 입문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태(胚胎)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대법관과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거치며 명성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 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를 거쳐 대권에 도전한 인물이다.

그를 잘 아는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총재는 평생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민주화투쟁을 벌인 끝에 대권을 잡은 DJ나 YS와는 상이한 길을 통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총재는 인기를 업고 정치라는 차에 ‘프리 라이딩’(무임승차)한 측면이 있다. 이는 ‘타이밍의 예술’로 통하는 정치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대여투쟁 방식이 과거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곧 이총재의 강경 일변도 대여투쟁이 완전한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권 무임승차’ 및 아마추어리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여건이 타이밍의 실패와 투쟁전략 부재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원인이 있다. 부정선거와 편파수사를 고리로 16대 국회 개원투쟁을 벌인 게 단적인 예다. 그 투쟁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회 개원 후가 아닌 개원 전에 여론화해 여권이 발을 빼지 못하도록 압박해야 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최근 여름휴가차 부산에 들러 측근 인사들과 만나 이총재를 직접 겨냥해 “정치의 ABC도 모르는 사람” 운운하며 강한 불만을 나타낸 것도 사실은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내 비주류의 한 중진의원도 “이총재가 정치 지도자적인 덕목을 갖추고 당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더 신경써야 할 시점에 대권만을 의식해 무리한 대여투쟁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사실 한나라당 소속의원 133명 가운데 대부분은 대여투쟁 경험이 일천한, 과거 여당의 체질과 논리에만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그 비율을 약 90%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총재의 대여투쟁이 더 효과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투쟁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가 많다. “장외투쟁이나 대중집회, 가투(街鬪) 같은 강경 일변도의 방식을 통해 어설프게 3김 흉내를 내는 건 시대적 조류에도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총재는 지난 8월31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형성을 주창해온 이총재가 20세기적인 투쟁방식을 답습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과 여당은 야당을 왜소하고 무력화해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이총재는 2년 전에도, 지난해에도, 또 지금도 “국회를 무력화하고 야당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국회를 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무시로 등원거부와 장외투쟁, 심지어는 의원직 사퇴 등을 내걸고 대여투쟁을 벌여 왔다. 하지만 이는 이총재가 그동안 날카롭게 비판해 왔던 소위 3김정치의 유산이다. 국회는 여당을 위해서가 아니고 국민을 위해 여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 야당의원이 무려 120여명이나 참여해 벌인 청와대 앞까지의 거리시위 때 가두에서 이들의 행진에 박수를 보낸 이는 정확히 5명에 불과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총재에게 이렇게 고언을 던지고 있다. “3김과는 달라야겠다는 의무감에서라도, 21세기적 정치문화를 창출한다는 소명의식에서라도 그는 구시대의 대여 투쟁방식을 단순 벤치마킹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방식의 21세기적 투쟁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원죄와도 같은 아마추어리즘의 극복을 위한 선결과제다.”



주간동아 2000.09.14 251호 (p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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