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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3>|1976년 ‘판문점 도끼살해 사건’ 관련 문건

‘살해’부터 ‘절단’까지 사건현장 촬영

제3검문소, 제5관측소 두 곳서 카메라로 ‘생생히’ 기록…미군 ‘의도적 사건’ 소문도

‘살해’부터 ‘절단’까지 사건현장 촬영

‘살해’부터 ‘절단’까지 사건현장 촬영
1976년의 ‘판문점 도끼살해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은 미8군 사령관이자 유엔사 사령관이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모든 상황을 총관리하는 워싱턴특별대책반(WSAG)이 워싱턴에서 가동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최종 결정은 미 대통령인 포드가 내렸지만, 사건 발생에서부터 마무리까지 만 사흘 동안 현장에서 작전을 총지휘했던 사람은 스틸웰 대장이었다.

도끼살해 사건 사흘 후인 76년 8월31일 오전 7시, 미 육해공군의 대규모 지원하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전격적으로 전개된 미루나무 절단 작전의 이름은 미국 민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버니언(Paul Bunyan)의 이름을 따서 붙인 ‘폴 버니언 작전’이었다.

미 국무부의 한 비밀 보고서는 도끼살해 순간부터 폴 버니언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전구 사령관(Theater Commander) 스틸웰 장군이 위기 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해놓고 있다.

‘판문점 살인: 위기 해결 과정에서의 전구 사령관의 역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미 국무부의 이 48쪽짜리 보고서는, 판문점 사건이 발생한 지 11년이 지난 1987년 3월6일, 스틸웰 사령관과 폴 버니언 작전에 같이 참여한 미 해병대 콘라드 드라토(Conrad DeLateur) 대령에 의해 작성되어 국무부의 선임 외교관을 위한 세미나에 제출된 것으로, 지난 92년 2월에 비밀 해제된 문건이다. 이 보고서 내용 중 주요 부분을 간추려 재구성한다(보고서 전체 내용은 8월30일 이후 KISON의 웹페이지 www.kison.org에서 볼 수 있음).

스틸웰 장군이 그의 참모장인 싱글러브 소장으로부터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 내에서 일어난 도끼살해 사건에 대한 최초 보고를 받았을 때 그는 일본 교토의 한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8월18일 오후 1시, 3박4일간의 일본 공식 방문 일정의 이틀째 날이었다.



보안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전화였기 때문에 싱글러브가 스틸웰에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싱글러브: “공동경비구역에서 끔찍한 난투전(terrible melee)이 벌어져 2명의 미군 장교가 죽었다. 구역 내 병력을 소개시키는 중이며, 유엔군과 북한군의 접전은 없다. 북한의 후속 행동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스틸웰: “군사정전위를 소집하라. 나는 일단 도쿄를 거쳐 서울로 돌아간다.”

스틸웰과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국무부의 이 보고서는 이때까지만 해도 ‘스틸웰은 앞으로 72시간 동안 1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스틸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한국전(제15보병연대장)과 베트남전(미 육군 24사단장)을 거친 노장인 데다가, 주이탈리아 대사 군사 자문관과 CIA 극동분대장, 태국 군사지원단장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감각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틀 전 그는 은퇴를 발표한 상태였다.

도쿄를 출발한 스틸웰이 2시간의 비행 끝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사건 당일인 8월18일 오후 8시였다. 공항에는 싱글러브 소장과 작전참모장 J. J. 코얼러 소장, 군법무관 핀켈스타인 대령 등이 나와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용산 미8군으로 이동하는 40분 동안 스틸웰은 차 안에서 비로소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판문점 사건 당시 일반인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것 중 하나는 공동경비구역 내의 평소 상황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공동경비구역 내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경비 관행을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 비밀 보고서는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의 병력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도 적어놓고 있다.

‘유엔사 병력은 총 166명으로 공동경비구역 미 육군지원단(USASG-JSA)에 소속되어 있고 3개 소대로 구성되어 있다. 1개 소대는 미군과 한국군 장교 각 1명 및 26명의 미군 사병과 15명의 카투사 사병으로 구성되며, 3개 소대가 교대로 다른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첫번째 소대는 공동경비구역 경비 초소에 배치되어 군사정전위원회 위원 및 방문자들의 신변 안전을 책임진다. 두번째 소대는 신속반응군(GRF)으로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유엔사 검문소(CP) 남쪽 75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세번째 소대는 휴식을 취한다.

이 보고서는 또 문제의 미루나무를 둘러싸고 오갔던 북한군과 유엔군의 평소 신경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엔사 병사들과 북한군 사이의 이런 식의 대화는 흔한 일이다. 북한군은 이 일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공동경비구역 지휘관인 비에라(Vierra) 중령은 나무를 잘라버리지 않고서도 가지를 조금만 쳐내면 관측 시야가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공동경비구역의 일상적인 평소 상황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8월18일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둘러싸고 북한군과 한국인 노무단 사이에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

사건 당일, 가지치기 작업을 위해 현장에 투입된 한국인 노무단은 모두 5명이었다. 유엔사 소속의 경비병 10명과 2명의 미군 장교, 한국군 김문환 대위가 동행했다. 오전 10시30분이었다. 이들이 현장에 접근하기 시작할 때부터 미군측은 현장 상황을 빠짐없이 촬영하고 있었다. 잠시 뒤 벌어진 살해 장면까지 필름에 담겼음은 물론이고, 이 사진은 워싱턴특별대책반에 긴급 전달되어 사건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

이 사진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한국민들 사이에서는 미군측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계획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우발적인 사건을 어떻게 필름에 담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국무부의 보고서는 당시 카메라 촬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밝히고 있다.

‘8월6일에 있었던 북한군의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비에라 중령은 안전을 위한 예방책으로 공동경비구역 임무 소대(Duty Platoon)를 공동 임무 장교(JDO)와 함께 나무에서 600미터 떨어진 제4검문소에 배치했으며, 이상한 동태를 기록하기 위해 제3검문소와 제5관측소에는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다. 또 이 작업의 지휘자인 보니파스 대위에게는 난처한 일을 당할 경우 즉각 현장 경비 장교들을 호출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제3검문소(CP 3)와 제5관측소(OP 5)의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 장교 박철이 작업반 앞으로 다가왔고, 양측간에 시비가 붙기 시작했다.



주간동아 2000.08.24 248호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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