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8

2000.08.24

청소년 동성애자 “은둔은 끝났다”

인터넷 모임 결성 제 목소리 내기…인권학교·문화축제 통해 편견·차별 뛰어넘기

  • 입력2005-09-26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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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동성애자 “은둔은 끝났다”
    8월10일 서울대 내의 한 대형 강의실. 오후 1시가 되자 수십명의 청소년들이 속속 이곳에 도착했다. 출석 체크를 하고 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얘기하느라 강의실이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오늘 할 일은 공동작품을 만들고 모임별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것. 끼리끼리 자리잡고 앉은 학생들은 각자 가지고 온 재료를 이용해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고, 한쪽에서는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방학이면 어디서든 으레 열리는 청소년 캠프같이 보였지만, 여기에 모인 학생들은 일반(一般)과는 조금 다른 ‘이반’(異般)들이다. 학교의 이름은 ‘청소년 동성애자 인권학교’. 동성애자 인권단체가 14~19세 사이의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열고 있는 이 학교는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청소년기는 자아정체성이 확립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정확한 정보나 자료가 없으면 혼란만 커지게 되죠. 미국의 경우 청소년 자살의 30, 40%가 동성애를 비관한 것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인권에 대해 자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맡고 있는 강지호씨(가명·27)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남성 동성애자 인권단체 ‘친구사이’에 소속해 있다. 그는 청소년 동성애자들에 대해 “성인에 비해 오히려 ‘커밍 아웃’(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는 것)하는 비율도 높고 PC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나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기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교실에서 키스하는 모습이 발각돼 두 학생 모두 퇴학당한 일이 있었다. 반면, 방송실에서 성관계를 하다 발각된 남녀 학생에게는 가벼운 징계만 내려졌다는 것. 이처럼 일선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시각이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강씨는 지적한다.



    인터넷의 청소년 동성애자 모임 ‘Any79’의 시솝으로 인권학교에 참가한 김모군(고3)은 작년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커밍 아웃’을 했다. “처음엔 놀라고 이해를 못하시던 부모님이 지금은 그냥 지켜봐 주신다. 그래도 다른 쪽이길 바라시는 건 여전하다. 이젠 동성친구를 집에 데려가면 괜히 불안해하신다. 여자친구를 데려가면 오히려 안심하시고….”

    김군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를 좋아하는데 그는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더 좋았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정확히 알게 된 건 불과 1년 전. 그 전까지 그를 지배한 건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인권학교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여느 청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밝고 쾌활했다.

    김군의 말에 따르면,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회원의 대부분인 ‘Any79’의 회원수는 1300여명. 한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이벤트도 개최한다. 요즘 그는 9월 ‘퀴어문화축제’ 기간 중 있을 ‘청소년 이반의 날’ 행사 준비로 바쁘다. “청소년들을 위한 콜라텍도 열고 학교 선생님, 정신과 의사선생님들을 모시고 간담회도 가질 생각이에요. 서로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으면 해서요.”

    인터넷이나 PC통신상에는 ‘Any79’ 외에도 ‘아쿠아’ ‘또래끼리’ ‘달팽이’ 등 많은 청소년 동성애자 모임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성인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뜬 시기가 청소년 시기임을 감안할 때, 청소년들의 동성애적 감정을 그저 모른 체 덮어둔다고 될 일은 아닐 듯하다. 청소년 성문화센터 배정원 상담부장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는 부모들이 자식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상담을 요청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배씨의 조언이다.

    “전화해서 울기부터 하는 부모도 있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부모도 많다. 동성애를 성도착이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꾸짖기보다 일단은 인정하고, 자식이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일탈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잡아줘야 한다. 청소년기는 성적 성향이 굳어지지 않은 시기고 동성을 좋아하는 느낌을 동성애로 확신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 동성애자로 살게 될지, 이성애자로 살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해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기란 걸 일깨워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를 부정당한 동성애자들은 이제 서서히 사회의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95년부터 대학 내에 동성애자 모임이 결성되기 시작한 이후, 최근에는 대학본부에 공식 등록되는 동아리(서울대 ‘마음006’)가 생겼고, 동성애자의 처지에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을 상영하는 ‘퀴어영화제’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당당하게’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올해에는 영화제 기간에 맞춰 동성애자들의 공개 축제가 처음으로 열린다. 9월2~10일 서울 신촌 이태원 등지에서 개최되는 ‘무지개 2000’ 축제가 바로 그것. 여기에는 동성애자 인권단체와 대학가 동아리들, PC통신과 인터넷 동호회 등 전국의 20여개 동성애자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의 날’ ‘트랜스 젠더(성 전환자)의 날’ ‘레즈비언(여자 동성애자)의 날’ ‘이반의 친구들(동성애자를 가족이나 친구로 둔 사람들)의 날’ ‘청소년 이반의 날’ 등 날짜별로 주제를 정해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동성애가 무조건적으로 금기시되던 예전과 달리 근래에는 영화에 동성애가 자주 등장하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등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 변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배경래씨는 “우리나라의 경우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법률적, 정치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억압이다”고 말한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힘과 동시에 사회적 적대와 혐오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이렇게 공개적인 행사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고 ‘차이’를 인정하는 성숙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열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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