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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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마 휴대폰’ 부작용 터졌다

신청서 작성 안하는 선불통화 서비스, 범죄 악용 잇따라…신원확인 안 돼 추적도 헛고생

  • 입력2005-08-22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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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지 마 휴대폰’ 부작용 터졌다
    7월28일 회사원 박모씨(33)는 부업을 하는 아내를 위해 모 이동통신회사의 선불통화 서비스에 가입한 뒤 요금충전카드를 하나 샀다.

    박씨가 구입한 카드는 1만원짜리. 서비스에 가입해 선불통화용 이동전화 번호를 부여받은 박씨가 충전카드에 적힌 9자리의 카드 고유번호와 즉석복권처럼 카드 표면을 긁으면 나타나는 비밀번호를 단말기에 순서대로 입력하자 곧바로 휴대폰이 개통됐다. 선불통화 서비스는 일반 이동전화와 달리 서비스 가입시 별도의 신청서를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가입자의 신분이 철저히 숨겨지게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선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있는 전천후(?) 휴대폰이 되는 셈이다.

    박씨는 “이동전화 사용자라면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5만∼7만원의 가입비와 월 기본료, 전화세 등을 전혀 내지 않아도 되고, 카드의 액면가만큼 통화할 수 있는 경제성이 큰 매력으로 여겨져 가입했다”고 했다.

    일명 ‘묻지 마 휴대폰’이 대인기다. ‘묻지 마 휴대폰’의 정식 명칭은 이동전화 선불통화 서비스. 최근 2년새 각 이동통신회사들이 앞다퉈 선보이고 있는 이 서비스는 고객이 중고 단말기를 갖고 있거나 별도의 신규 단말기를 구입했을 경우 일정 금액의 통화요금을 이동통신회사에 선불(대리점에서 직접 요금을 충전하거나 충전카드를 현금으로 구입한 뒤 간단한 단말기 조작으로 요금 액수를 휴대폰에 충전)하고 그 금액만큼 일정기간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통신 서비스다.

    선불통화 서비스는 단기 휴대폰 사용자나 단기체류 외국인, 미성년자, 신용불량자 등 이동통신 이용에 제한적인 이들에게 통신 편의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출발했지만 사실상 아무나 가입할 수 있는 데다 가입비나 기본료는 물론 번거로운 신청서 작성, 신용 확인 등이 전혀 필요없어 가입자가 폭증하고 있다. 특히 지난 6월1일 휴대폰 단말기 보조금 전면 폐지 조치 이후의 이동전화 신규 가입자 중 상당수는 예전에 비해 부쩍 오른 30만, 40만원대의 단말기 가격에 부담을 느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 서비스에 가입하고 있다.



    지난해 7월1일 선불통화인 ‘019 YES카드’ 서비스를 시작한 LG텔레콤의 경우 현재 360만명인 전체 가입자의 30% 정도가 이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불통화 요금체계가 10초당 65원으로 기존 통화료보다 다소 비싼데도 보조금 폐지 이후 가입자가 폭증했다는 것

    . 다른 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018 앵콜카드’란 이름으로 선불통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 한솔엠닷컴의 경우 앵콜카드 누적 가입자(장기 사용자)가 전체 가입자 272만명의 2.6%에 불과하지만 보조금 폐지 이후 선불통화 가입자가 급증, 7월 한달 신규 가입자의 20%가 앵콜카드 서비스에 가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 이동전화에 가입하지 않고도 휴대폰을 저렴하게 쓸 수 있는 이 서비스의 장점은 통화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직종의 근무자들이나 가정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 급격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문제는 이 서비스의 부작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 누구든, 언제나, 신원확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입할 수 있다는 느슨한 가입절차가 각종 지능형 범죄에 악용되면서 ‘묻지 마 핸드폰’이 ‘범죄의 은둔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4월 천안에서는 가짜 아이디로 모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가입한 강모씨(19·서울시 동대문구)가 자신의 물건을 사겠다고 나선 입찰자들의 돈을 떼먹는 사기행각을 벌이면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선불통화 서비스를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3월 수원 중부경찰서는 러시아 여성이 개입된 전국 규모의 출장마사지 조직을 기획수사 끝에 적발했지만 주택가에 뿌려진 광고전단에 기재된 이동전화번호 대다수가 ‘묻지 마 휴대폰’ 번호여서 더 이상의 추적 수사를 하지 못했다. 불법 마사지 조직을 완전히 캐내는 데는 사실상 실패해 윤락녀 몇 명만 입건하는 데 그쳤던 것.

    물론 ‘묻지 마 휴대폰’의 경우도 일반 이동전화처럼 통화명세나 사용 중 발신자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경찰이 이동통신회사의 협조를 얻어 통화명세를 추적하더라도 통화시각과 통화시간, 상대 통화자의 전화번호만 파악될 뿐 가입 당시 신원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 ‘얼굴 없는’ 범인의 신상 정보파악이나 검거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수원 중부서 한효성 폭력2반장은 “출장 마사지는 물론 장기매매, 원조교제, 악덕 사채업 등에도 ‘묻지 마 휴대폰’이 널리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회사 공금을 횡령하는 등 잘못을 저질러 도피하기 전엔 일단 ‘묻지 마 휴대폰’에 미리 가입해둬야 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통할 정도”라고 털어놨다.

    이에 대한 이동통신회사들의 입장은 어떨까. “조직폭력배나 신분 노출을 꺼리는 유흥업 종사자들이 선불통화 서비스를 즐겨 이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LG텔레콤 관계자의 말처럼 통신회사들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선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동통신회사 관계자들은 저마다 “우리 회사는 가입자 수보다는 질을 중요시하는 영업정책을 펴고 있다”며 타사보다 선불카드 영업에 소극적이라 말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선불통화 서비스가 ‘장삿속’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016 프리카드’란 선불통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한국통신프리텔의 한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선불통화 마케팅에 적극적이지 않다”며 “선불통화 서비스는 후발 통신업체들이 가입자 확대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하나의 휴대폰으로 4개의 번호까지 동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형’ 서비스까지 내놓고 있다.

    이같은 변형 서비스 역시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지난 6월 경찰에 붙잡힌 명문대 학생 정모씨(28·강원도 원주시)는 한 대의 휴대폰으로 두 개의 번호를 사용할 수 있는 모 이동통신회사의 ‘투넘버 서비스’에 가입한 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여고생 및 여대생들과 연락해 교제하며 이들 중 50여명을 성폭행하고 나체사진을 찍기도 했다. 검거 당시 경찰은 ‘낌새’를 알아챈 정씨가 두 개의 번호 중 여성들과 주로 연락한 한 개의 번호에 대한 서비스 이용을 중지해 추적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동통신회사들의 상술은 극에 달한 느낌이다. 이들 업체는 지난 5월까지 4만, 5만원 이상의 선불카드를 구입할 경우 중고 단말기를 가입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편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보조금 폐지 이후 중고 단말기 가격이 치솟자 이같은 ‘특혜’를 갑자기 중단하는 등 ‘배짱 영업’으로 일관하고 있다.

    선불통화 서비스는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정보통신 분야 전문 시장조사 업체인 스트래티지스 그룹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서는 ‘세계적으로 이동전화 가입률이 가장 낮은 중남미에서 선불통화 서비스가 신규 가입자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신규 가입자 중 3분의 2를 선불통화 가입자가 차지할 것’이란 전망을 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휴대폰 보급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만큼 특별한 추가비용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선불통화 서비스시장이 이동통신회사들의 새 격전장이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끝간 데 모를 이동통신회사들의 상술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적절한 규제와 자정 노력이 없는 한 ‘묻지 마 휴대폰’은 여전히 ‘범죄의 은둔지’로 남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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