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1

2000.07.06

초록의 계절에

  • 입력2005-07-12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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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의 계절에
    초록이 춤춘다. 빗속의 군무가 흥겹다. 싱싱함을 되찾은 가로수들의 율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때로는 뭉게구름처럼 강약을 되풀이하는 모양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열정적인 몸짓 같다. 게으른 봄비 탓에 대기는 메마르고 그 속에서 초록은 윤기를 잃어갔다. 이제 그 초록이 갈증을 풀고 환희의 춤을 춘다.

    제법 굵은 빗줄기에도 강하게 되살아나는 초록이 새삼 반갑다. 지난해 겨울의 한가운데서 봄의 황사보다 더 짙은 누런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자연의 황색 경보로 느껴졌고 다가올 봄이 걱정스러웠다. 금세기의 마지막 봄이 황사에 묻혀 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다행히 신록의 봄은 왔으나 긴 겨울 가뭄 탓인지 꽃망울이 터져도 나무는 물오름이 더디어 희나리 같았다. 변덕스런 기온으로 봄의 전령 산수유와 5월 라일락이 안팎사돈 인사하듯 어색하게 함께 꽃을 피웠다. 힘겹게 피어난 그 꽃들이 한번 비에 맥없이 져버리니 보는 이의 마음도 허전했다. 그런데 화사한 꽃잎을 떨군 비를 맞으며 초록 잎새는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더욱 푸르러진 그 초록에서 꽃과는 또다른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겨우내 잠들었던 자연이 기지개를 켤 때, 살며시 깨어나는 눈빛으로 초록은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른 봄, 여린 버들의 노랑인 듯 맑고 투명한 연두와 언 땅을 뚫고 돋아난 새싹들의 야무진 듯 보이나 미숙한 초록, 모내기 끝낸 논에 가득 찬 어린 모의 발랄한 초록, 초여름을 장식하는 성숙한 녹색과 너무 짙어 검푸른 여름 산의 진녹색까지 참으로 다양한 빛깔로 힘찬 생명력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도 초록은 변함없이 돋아나고 무성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괴롭힘에도 아무런 원망의 기색도 없다. 어느 순간부턴가 꽃보다 초록에 더 정이 가기 시작했다. 초록이 있는 한 자연은 살아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러기에 2000년의 봄을 태워버린 동해안의 산불, 그 검은 잔해들을 보며 자연의 주검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그 봄이 끝나기도 전에 까만 잿더미 위에 뾰족이 솟아난 어린 싹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 속의 초록 잎새를 쓰다듬었다. ‘애썼다. 정말 애썼다. 그리고 고맙다.’ 이 말이 입 속에 맴돌았다. 어떠한 환란도 이겨낼 수 있는 정화와 재생의 능력이 잠재된 자연을 마주하니, 초록으로 피어나는 희망에 감사하고 어리석은 걱정을 잠재운 그 영원성에 머리숙여졌다.

    비 그치고 햇살이 나니 깨끗해진 초록 잎새가 초롱초롱한 눈빛되어 반짝인다. 초록이 풍성한 계절, 그 강한 생명력을 배우기 위해 푸른 그늘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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