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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구의 술기행|포천 막걸리

군인들 사로잡던 ‘그 맛 그대로’

60~70년대 예비역들 입소문으로 전국적 명성…50m 천연 암반수가 술맛 결정

군인들 사로잡던 ‘그 맛 그대로’

군인들 사로잡던 ‘그 맛 그대로’
포천에는 이름난 산이 많다. 그 중에서 경기 금강이라는 운악산에 올랐다. 포천 운주사 입구에서 운악산 기도원 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능선을 따라 곧장 정상으로 이어지는 명쾌한 등산로였다. 아침 안개인 줄로만 알았더니, 궁예 성터가 있다는 산 중턱에도 이르지 못해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려가야 할지, 조금만 참고 더 올라가야 할지, 몇 번을 망설이면서도 도달한 결론은 ‘10분만 더 가보자’는 것이었다. 산길 안쪽 어디에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궁예 성터라는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 있고 돌 하나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

궁예가 도읍을 정한 곳이 포천과 맞닿은 철원이었으니, 1100년 전에 포천은 궁예의 땅이었다. 그래서 포천에는 궁예의 자취가 많다. 건국 11년만에 왕건에게 쫓겨와 크게 울었다는 울음산 곧 명성산(鳴聲山), 왕건 군사가 궁예 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는 여우고개(이동면 장암리), 산길이 너무 험해서 궁예가 말에서 내려 넘어간 고개 도마치(이동면 도평리), 궁예가 도망친 마을 패주골(영중면 성동리 파주골), 궁예가 마지막 항거를 하였다는 운악산의 궁궐터 등이 있다.

포천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47번 국도의 긴 꼬리가 눈에 들어올 즈음에 빗방울도 멎어 있었다. 언제였는가 싶게 하늘은 푸르러, 산행을 포기했더라면 후회막급할 뻔했다. 멀리 시야가 트이고, 남쪽으로 아기봉(772m)과 주금산(814m)이 당당하게 활개를 펴고 있었다. 태백산맥에서 가지를 뻗은 광주(廣州)산맥의 멧부리로, 포천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광덕산(1046m) 백운산(937m)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그리고 운악산(936m)으로 이어져 온 산줄기였다.

이 높은 산봉우리들이 깊은 계곡을 만들었고, 맑은 물을 만들었다. 포천의 소문난 술 막걸리가 맛이 좋은 이유도 이런 멧부리 때문이다. 청계산 기슭에서 일동막걸리를 만드는 일동주조 대표 이동한씨는 “포천은 물이 많고 좋습니다. 5m만 파도 포천석이라는 화강암층이 나타납니다. 암반층으로 50m만 내려가면 청정한 물을 얻을 수 있으니 술맛이 좋을 수밖에요”라고 말했다. 포도주나 배술처럼 과일의 즙이 발효되어 술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술이 물에 의해서 그 맛과 질이 결정된다. 더욱이 제조 방법이 비슷한 막걸리의 품질은 물맛이 크게 좌우한다.

전국 규모의 단일 조직인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에 가입된 막걸리 회사는 996개에 이른다. 내년이면 제한이 풀리지만, 현재 막걸리는 시나 군 단위로 제한 판매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도시의 막걸리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규모가 영세하다. 시쳇말로 아버지와 아들과 며느리가 하는 게 막걸리 회사라는 말이 있다.



포천에는 다섯 군데에 막걸리 회사가 있는데, 규모가 제법 크다. 모두들 수목이 울창한 산을 하나씩 끼고 있는데, 백운산 아래 이동막걸리, 청계산 아래 일동막걸리, 수원산 아래 포천막걸리, 국망봉 아래 포천왕가막걸리, 주금산 아래 내촌막걸리 제조 회사가 있다. 모두들 자동화 설비를 갖췄으며 전국에 유통시킬 수 있는 살균 탁주를 만들고 약주류도 제조하고 있다. 특히 포천의 이동막걸리와 일동막걸리는 인천 농주와 더불어 일본에까지 수출되고 있다.

군인들 사로잡던 ‘그 맛 그대로’
포천 막걸리의 활성화에는 포천을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산정호수와 백운계곡에 놀러왔다가 일동 유황 온천 단지에서 온천욕을 하고 푸짐한 이동 갈비를 실컷 먹고 돌아가는 여정은 관광 버스를 대절한 아줌마 유람단의 완벽한 관광 상품이다. 이 여정에, 걸쭉한 포천 막걸리 생주 한 잔을 걸치고 두어 병씩 사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막걸리에는 유통 기간이 5일밖에 안되는 생주(生酒)가 있고, 6개월이 가능한 살균주(殺菌酒)가 있다. 요사이 대도시에서 구경할 수 있는 포천막걸리는 살균주이기 때문에, 포천군 안에서만 판매되는 생주를 포천에 온 김에 한 잔 걸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부터 마셔왔던 막걸리는 모두 생주였다. 유통 기간을 길게 하려고 마지막 단계에서 효모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탄산을 주입하면 살균주가 된다. 생주에 비해 청량감은 떨어지지만 술이 부드럽고 시큼한 냄새가 덜 난다는 장점도 있다.

막걸리는 가장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 가장 값싼 술이다. 제조기간이 10일 가량 걸린다. 밀기울로 누룩을 띄우면 시간이 많이 들지만, 요사이 막걸리 회사들은 에스퍼즐러스 가와찌라는 하얀 곰팡이를 잘 쪄낸 밀가루에다 강제로 이식해서 누룩을 2일만에 만들어낸다. 이 누룩에 물을 잡고 효모균을 섞어 4일 동안 발효시키면 밑술이 된다. 밑술에 물을 붓고 멥쌀 고두밥을 넣어 4일 동안 숙성시키면 쌀막걸리가 된다. 이때 멥쌀 대신 밀을 넣으면 밀막걸리가 된다.

한때 양곡 정책 때문에 쌀막걸리 제조가 금지되면서 쌀막걸리가 고급이고 밀막걸리가 저급이라는 단순한 인식이 퍼졌는데, 밀이 어느 정도 들어간 막걸리라야 숙성도 잘되고 맛도 부드럽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쌀막걸리라고 부르는 것들도 밀가루가 20%에서 50% 가량 섞여 있다.

포천 막걸리가 유명해진 것은 60, 70년대 일이다. 1964년부터 군부대에 일동막걸리와 이동막걸리가 납품되었다. 탱크차에 술을 싣고 영내 PX의 항아리에 담아주면, 그곳에서 주막처럼 군인들에게 막걸리를 팔았다. 고된 훈련 끝이면 싸구려 담배 한 개비조차 달콤한데, 막걸리 한 사발이라니 얼마나 달콤했겠는가. 군부대가 많은 포천에서 훈련받고 전국으로 흩어진 사내들이, 그 시절 그 술맛을 못 잊어서 다시 찾게 된 술이 포천 막걸리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포천 장을 보러 온 소매상들이 맛이 좋아 지게에 지고 몇 병씩 서울 마장동과 수유리 등지에 내다 판 것이 명성을 더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운악산 정상 부근은 바위들이 많아서, 밧줄의 도움 없이는 오르기 어려운 산이다. 비구름에 한 차례 어깨를 적시고, 한결 산뜻해진 대기 속에 몸을 맡기니 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936m의 산 정상에 오르니 산철쭉이 한창이었다. 숲속의 발그스레한 산철쭉이 들여다볼수록 더욱 선연하고, 울뚤불뚝한 산맥들이 들짐승처럼 내닫고 있었다. 포천 막걸리 한 잔으로 갈증을 풀었으면 딱 좋겠다는 유혹에 부지런히 산길을 내려갔다.





주간동아 2000.06.01 236호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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