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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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B 출신, 벤처업계 주름잡는다

120여개 벤처캐피털 중 40여곳 인맥 포진…‘투자 노하우’가 큰 자산

  • 입력2005-11-29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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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B 출신, 벤처업계 주름잡는다
    80년 신군부 시절은 거의 모든 국민에게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 형식적인 선거 절차를 거쳐 탄생한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 86년부터 3년간 ‘3저(低)호황’의 열매를 맛보게 했기 때문. 물론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이 재벌위주의 경제체질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했고, 결국 이는 외환위기의 원인(遠因)이 됐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80년 12월 국보위가 제정-공포한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법도 권위주의정권의 ‘긍정적 유산’이라고 할 만하다. 80년대에는 기술집약적산업이 우리 경제를 주도해야 한다고 판단, 기업의 기술 개발 촉진과 중소 벤처기업의 금융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금융기관 설립이 이 법의 제정 목적이었다.

    81년 출범 당시 성공 가능성 회의적

    그러나 이 법에 의해 81년 5월 탄생된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현 KTB네트워크)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었다. 당시 이 회사에 출자 요청을 받았던 산업은행이 거절했을 정도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정부가 일부 출자하고 나머지는 전경련에 떠넘겨 회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대의 본격적인 벤처캐피털의 출범이었다.

    이후 KTB는 유망한 벤처기업 등 중소기업을 적극 발굴 육성했다. 메디슨 미래산업 등 스타급 1세대 벤처기업을 비롯해 성미전자 팬택 다우기술 인성정보 시공테크 YTC텔레콤 등이 오늘처럼 확실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 것은 KTB의 지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코스닥 등록 기업 중 2분의 1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KTB와 인연을 맺은 기업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KTB는 이와 함께 능력 있는 벤처캐피털리스트도 많이 양성했다. 현재 120여 개 벤처캐피털의 3분의 1 정도에 KTB 인맥이 포진해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들을 시샘 어린 말로 ‘KTB 마피아’라고도 하지만 KTB가 ‘벤처캐피털리스트 사관학교’ 역할을 충실히 한 것만은 인정하고 있다. KTB 출신 한 인사의 말이다.

    “벤처캐피털에서는 유망 기업에 대한 투자 못지 않게 투자기업의 사후관리도 중요하다. 문제는 일부 벤처기업가들이 주식회사의 개념조차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벤처캐피털이 주주로서 경영 감시 및 견제 역할을 하려고 하면 벤처기업 쪽에서는 경영 간섭이라고 반발하면서 불만을 터뜨린다. 이래서는 신뢰관계를 쌓을 수 없고 ‘윈-윈’ 게임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KTB 출신들은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해오면서 노하우를 쌓았다. 사관학교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은 셈이다.”

    현재 벤처캐피털의 부사장급 인사 중 KTB 출신은 모두 10명. 심항섭 테크노캐피탈 사장, 서갑수 KTIC 사장, 연병선 한국아이티벤처 사장, 오태승 한미열린기술투자 사장, 전일선 드림캐피탈 사장, 김시훈 한화기술금융 사장, 이영수 에스엘창투 사장, 김선기 아이원벤처캐피탈 사장, 정성인 인터베스트 부사장, 현대창업투자 최선엽 부사장 등이 그들이다. 또 최근 설립한 벤처인큐베이팅 회사 ㈜아이풀 임종두대표도 KTB 출신이다. 그밖에 다른 벤처캐피털 업체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들은 일일이 거명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벤처캐피털 업계보다는 못하지만 직접 벤처기업 경영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KTB에서 벤처기업에 대해 ‘훈수’를 해온 경험을 살려 직접 벤처기업을 창업한 것. 코스닥 등록 업체인 I&T텔레콤 강정훈사장, ‘한국의 시스코시스템스’를 지향하는 통신장비 업체 미디어링크 하정률사장, 인터넷 벤처업체 웹패턴㈜ 방기수사장, 텔리넷 전관재사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가운데 벤처캐피털 쪽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매월 한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한다. 매월 넷째주 화요일에 만난다고 해서 모임 이름도 ‘화사회’로 정했다. 물론 “화사하게 커 나가자는 뜻도 포함돼 있다”(한미열린창투 오태승사장)는 설명. 모임이 있을 때마다 회원 40여 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이들 화사회 멤버 중에서 벤처캐피털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사는 연병선 한국아이티벤처 사장.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KTB 내에서도 ‘정통파’로 인정받았던 연사장은 KTB 재직 당시 메디슨 다우기술 팬택 등을 발굴한 주인공. 97년 KTB를 나와 한국통신과 다우기술 등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의 출자를 받아 한국아이티벤처를 설립했다.

    그는 한국아이티벤처 설립 이후 하이퍼정보통신 미디어링크 미래넷 등 유망기업을 적극 발굴, 이들 기업에 투자했다. 그는 최근 미국 동부지역에 지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뉴욕주 변호사 김동기씨에게 설립 업무를 맡겨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연사장은 이에 대해 “실리콘밸리는 투자 재원이 과다하게 몰려 경쟁이 심하고 외국 벤처캐피털의 진입이 어려운 반면 동부지역은 통신부문의 핵심 기술이 있는 데다 벤처캐피털간 경쟁이 적어 진입 장벽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KTB 출신들이 벤처캐피털 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KTB가 명실공히 국내 최초 최대의 벤처캐피탈이어서 많은 벤처캐피털리스트를 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83년 설립돼 KTB와 함께 업계를 양분했던 산은캐피탈 출신으로 ‘독립한’ 사람은 현재 1명(플레티넘창투 이창수사장)뿐이라는 점에서 KTB 출신의 ‘도전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이런 도전정신은 KTB의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길러졌다는 게 KTB 출신들 얘기. 직원 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해 4명이 KTB 출신인 테크노캐피탈 심항섭사장은 “보수적인 산업은행 출신이 중심이 돼 설립한 산은캐피탈에 비해 KTB는 설립 멤버들의 전직(前職)이 다양해 초기에는 한때 공대 출신과 상대 출신이 투자의 중심을 놓고 ‘기술이냐, 시장이냐’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이는 곧 조직의 활력과 자유스러움으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KTB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등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이 모여들었다. 84년 말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다가 98년 말 떠났던 ㈜웹패턴 손진운이사는 “다른 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월급을 준 것도 매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KTB가 대학 시절 고민했던 재벌 위주 경제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회사라는 데 마음이 끌렸다”고 말했다. 중소 벤처기업의 성장을 도와주는 KTB의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회사도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KTB 설립 멤버로 참여했던 이영수 에스엘창투 사장은 “KTB 설립 당시 자문과 지분 출자를 했던 세계은행(IBRD)이 용역을 줘 만든 인력계발 프로그램을 한국적 현실에 맞게 적용해 직원 교육을 시켰다”고 회고했다. 김선기 아이원벤처캐피탈 사장은 “직원들의 이직률이 낮아 그들의 경험이 그대로 회사에 축적될 수 있었다”고 KTB의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그러나 낮은 이직률이 나중에는 심각한 인사적체로 작용했고 이는 탈(脫)KTB를 재촉한 한 요인이 됐다. 특히 96년 11월의 기업공개는 인사적체로 마음이 들떠 있는 직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퇴직과 함께 우리사주를 처분해 목돈을 쥘 수 있게 되면서 앞다퉈 벤처캐피털 창업전선에 뛰어든 것. 또 유망한 벤처기업을 발굴, 육성해 회사에 상당한 기여를 한 직원들에게 특별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없었던 것도 직원들에게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작년 초 이뤄진 민영화도 직원들의 창업을 자극했다. 81년 공채 1기로 입사했다가 97년 6월 퇴사했던 인터베스트 정성인부사장은 “KTB는 설립 이후 수익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벤처기업을 육성한다는 사회적 책무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민영화는 이런 회사 전통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절이 싫어’ 떠난 스님의 심정으로 KTB를 퇴사한 직원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들의 벤처캐피털 창업 열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들 역시 최근 벤처 붐에 편승해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들은 돈 버는 것 못지않게 KTB에서 배운 벤처 투자의 정석을 실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코스닥 등록 직전의 벤처기업에 투자해 코스닥 등록 후 한창 주가가 오를 때 보유 지분을 팔고 빠지는 단기투자 위주의 일부 벤처캐피털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것.

    연병선 아이티벤처 사장은 “코스닥 시장이란 90년대 후반에 활성화됐기 때문에 KTB는 투자에서 회수까지 최장 10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 과정에서 창업 기업에 대한 투자와 육성, 벤처기업과의 파트너십 형성, 장기투자 및 회수의 관점을 배우게 됐다”면서 “그런 점에서 KTB 출신들은 다르다”고 말한다.

    인터베스트 정성인부사장은 “KTB 출신들은 지금과 같은 코스닥 조정기에 오히려 빛을 발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증시가 나빠지면 금방 투자에 소극적이 되는 일부 벤처캐피털과 달리 KTB 출신들은 초기 단계 투자에 강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주식시황이 나빠져도 이에 개의치 않고 멀리 바라보고 유망 벤처기업을 발굴하는 데 주력한다는 것.

    KTB에서 잠깐 근무했던 ㈜모음과 나눔 임종두사장도 벤처기업을 창업하면서 새삼 KTB 출신들이 초기 단계 투자에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작년 7월 ㈜모음과 나눔 창업 직후 아이티벤처 연병선사장이 4평짜리 ‘하꼬방’ 같은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는 등 철저한 심사를 거쳐 투자를 결정했다는 것.

    김시훈 한화기술금융 사장도 “KTB 출신들은 투자의 정석을 배운 게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한다. “현재 벤처캐피털이 120여 개나 될 정도로 포화상태에 이르다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하거나 언제 코스닥에 등록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갖는 벤처캐피털이 많은데 이런 벤처캐피털은 금방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요즘과 같은 증시 조정기에 힘을 발휘한다는 이들의 말을 검증하기는 아직 이르다. 또 이들이 그만큼 ‘좋은’ 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회사 덕을 본 측면이 많다는 지적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KTB를 뛰쳐나온 지금이야말로 이들이 진정한 능력을 시험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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