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상자 안 벼룩’과 홍대 앞의 몰락

힙합과 EDM에 눌린 밴드 음악, 새로운 르네상스 가능할까

  • 입력2016-07-25 17: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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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오랫동안 서울 홍대 앞에서 활동해온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스레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최근 밴드 신이 ‘재미’가 없다는 거다. 잘하는 팀은 많다. 현재 활동하는 팀들의 연주력, 사운드 메이킹은 과거와 비교불가한 수준이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팀도 ‘빵빵’한 이펙터와 정교한 연주로 능수능란한 공연을 펼친다. 레코딩 또한 마찬가지다. 인디 신의 역사가 20년간 진행되면서 쌓인 노하우로 해외 음반에 비해 부족할 게 없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음악 미학의 중요한 잣대인 송라이팅, 즉 창작력은 어떤가. 장르를 막론하고 주목할 만한 앨범은 계속 나오고 있다. 음악적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라이프 앤 타임’ 같은 인스트루멘틀, ‘공중도덕’ 같은 로파이 포크 등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음악이었다.



    재미가 사라진 홍대 앞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시장의 외면? 1990년대 중반 시작된 홍대 앞의 역사에서 이런 시장의 외면은 극히 일부 시기, 일부 예외적인 이들을 제외한다면 일상적인 일이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시장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신이 만든 음악으로 생계, 아니 용돈벌이라도 가능하던 상황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 대신 음악과 관련한 일로 생업을 유지하는 뮤지션은 오히려 늘어났다 말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 음악, 실용음악 입시 레슨, 그리고 대학과 지방자치단체 행사 등 음악과 관련한 ‘번외시장’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진입하기 힘들던 영역이다. 한때 꿈으로 여겨지던 록페스티벌은 거품이 빠졌다지만 야외 활동이 가능한 시기에 상시 열리는 이벤트가 됐으며, 신인 등용문인 각종 오디션도 굵직한 것만 어림잡아 5개가 넘는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왜 관계자들은 ‘재미’가 사라졌다고 말할까. 이 궁금증을 풀려고 멀리 갈 필요도 없다. 2000년대 중반 즈음으로 가자. 당시 홍대 앞은 일종의 대피소였다. 음반시장은 궤멸했다. 음원시장은 아직 정착하지 못했다. 기존 음반 제작자들은 아이돌 그룹은커녕 솔로형 아이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비와 세븐, 휘성 등이 시장을 제패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 무렵 유일한 아이돌 그룹이나 다름없던 동방신기가 한국이 아닌 중국 시장을 노리고 기획됐다는 사실이 당시 시장 상황을 말해준다.



    그러니 음반과 라디오에 기반을 둔 신인 뮤지션이 치고 들어갈 자리 따위는 없었다. 자연스레 인디 레이블이 그들의 터전이 됐다. 1990년대 인디 신의 주류였던 펑크, 얼터너티브의 영역을 (기존 인디 팬들 표현에 의하면) ‘말랑말랑한’ 음악이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노출 사고가 터지면서 ‘인디’ 전체에 거대한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만다. 신의 연성화가 급격하게 진행됐다. (   )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나마 ‘크라잉넛’ 등 1세대 밴드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때 관계자들의 아쉬움은 지금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상황을 돌파하는 씨앗을 제공한 건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등장이었다. 매 공연마다 차력 수준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다 죽여버려!’라는 듯 돌진하는 그들은 라이브 클럽에 활기를 재이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깨달았다. 증발해버린 (   )가 바로 ‘똘끼’였음을. ‘갤럭시 익스프레스’가 일깨운 똘끼야말로 홍대 앞을 돌아가게 하는 운동 에너지임을.  

    그 에너지에 가속도를 더한 건 신인 슈퍼스타들의 등장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 너마저’ 등의 등장과 확장은 오랫동안 염원해온 인디 신의 세대교체를 불러왔으며 1990년대 이후 다시 세상이 홍대 앞을 주목하게 했다. 인디 르네상스였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보자. 그렇다면 지금 홍대 앞에 없는 건 무엇인가. 똘끼? 스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 현재 홍대 앞의 장르적 스펙트럼은 무지개처럼 넓다. ‘혁오’라는 신진 스타도 있다. 단, 그 스펙트럼에 돌파력이 부족하며 혁오의 경우 ‘무한도전’이라는 치트키에 의해 엄청난 추진력을 얻었을 뿐이라는 것.

    문제는 그 돌파력과 추진력이 이미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빈지노부터 비와이에 이르는 힙합 세력은 홍대 앞 초기, 그리고 르네상스 시절 몇몇 뮤지션이 가졌던 록스타의 오라를 풍긴다. 거침없는 자기주장을 누구나 반할 만한 스킬과 에너지로 뿜어낸다. 눈치 따위 보지 않고 관심 없던 이들마저 반하게 한다. 페스티벌로 대변되는 다중의 열광? 올여름 주요 록페스티벌의 티켓 판매량이 부진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는 EDM페스티벌의 성공률이 높아지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의 매너리즘을 홍대 앞 스스로 혁신으로 돌파했다면, 지금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키워드를 이미 외부에서 가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주류가 아닌 다른 장르 음악에서.



    기성의 틀에 갇힌 음악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홍대 앞 인디 1세대는 1970년대 중·후반생들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이 대표적이다. 나이가 좀 많아봤자 70년대 초반생들이다.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 말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 너마저’ 등 홍대 앞 르네상스를 견인한 이들은 82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다. 이 두 세대의 공통점을 꼽자면 밴드 또는 싱어송라이터가 아카데믹 시스템에 편입되기 전 음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서 거론한 음악인 가운데 실용음악을 전공한 이는 연주자에 머문다. 팀의 중심인 송라이터는 학교 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음악을 공부한 이들이다.

    반면 현재 20대 음악인의 주축을 이루는 1990년대생의 음악은 몇 가지 틀 안에 갇혀 있다. 스타가 되고 싶은 이는 일찌감치 아이돌 연습생으로 빠진다. 아이돌에 거부감을 가진 이도 어릴 때부터 ‘슈퍼스타K’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자란다. 그리고 실용음악과에 입학해 매 학기, 아니 수시로 자신의 창작력이나 영감보다 정해진 화성과 음정 같은 기준에 따라 재능을 평가받는다. ‘상자 안의 벼룩’이 되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의 부작용인 ‘팬옵티콘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티스트에게 일반인의 도덕률을 적용하고, 여기서 벗어나면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디 음악인에게는 사소한 공격일지라도 보호해줄 방어막이 없다. 자기 검열의 방어막은 두터워져 간다.

    이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병 원인을 안다고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증상이 아니다.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역 문화는 탄생하면 언젠가 사멸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씨앗이 뿌려지고 새로운 열매가 맺힌다. 명동-신촌, 이태원-홍대 앞에 이르는 한국 청년 문화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기다려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동시적 부동산 폭등에도 홍대 앞 이외 지역에서 새 흐름이 시작되기를. 혹은 다시 한 번 홍대 신 안에서 르네상스를 이끌 세력이 탄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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