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5

2016.07.06

인터뷰 | 한국 바이러스 연구의 아버지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

“바이러스 치료제가 삶을 바꿀 것”

‘한탄바이러스’ 발견한 세계적 학자…“표적 치료제 곧 개발될 것”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07-04 16: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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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세균 공포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생겼죠. 지금 인류를 엄습하고 있는 바이러스 공포도 머잖아 극복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곳곳의 연구실에서 수많은 학자가 해법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으니까요.”

    이호왕(88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자신만만했다.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꼿꼿한 자세와 단단한 말투로 ‘과학에 대한 신뢰’를 역설했다. 이 명예교수는 꼭 40년 전인 1976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한탄바이러스’를 찾아낸 인물이다.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뒤 연구를 지속해 예방 백신도 개발했다. 이 명예교수에 따르면 세계에서 특정 질병의 병원체를 발견한 뒤 예방 백신까지 만든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유행성출혈열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을 공포에 빠뜨린 ‘괴질’이었어요. 고열을 동반한 출혈 증상이 수천 명에게서 나타났고 그중 수백 명이 사망했으니까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휴전선 일대 주둔 군인과 민간인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로 잇달아 사망했죠. 이 때문에 남과 북 양쪽에서 ‘세균전 아니냐’는 말이 나왔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이 질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행성출혈열 백신 만든 의학계 거인

    이 명예교수의 말이다. 이렇게 세계적 관심이 쏠린 질병의 비밀을 찾아낸 이가 바로 그다. 이 명예교수는 이 공로로 1979년 미국 최고시민 공로훈장을 받았고 한국인 최초 미국학술원 외국인 회원, 한국인 자연과학자 최초 일본학사원 명예회원 등의 기록도 세웠다. 지금도 세계 각국 의학교과서에는 이 명예교수 이름과 그가 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한탄강’ 지역 이름을 따서 붙인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이 명예교수는 국내에서도 1987년 인촌상을 시작으로 한국과학상, 호암상, 국민훈장 목련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등 과학기술인이 받을 수 있는 유수의 상을 석권했다. 대한민국 학술원장을 역임한 그는 현재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유일한 생존 과학자이기도 하다. 이 명예교수의 이런 명성과 영광은 모두 한평생 이어진 바이러스 연구에서 비롯됐다. 최악의 수족구병 감염 사태가 진행 중인 6월, 이 명예교수를 만난 건 이 때문이다.

    수족구병, 뇌염, 뎅기열, 말라리아 등과 지난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는 항상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외신에 자주 등장하는 에볼라바이러스와 지카바이러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 일각에서는 “인류가 바이러스로 절멸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 바이러스 전문위원 등을 역임한 그는 “인류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할 날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명예교수는 1954년 서울대 의대 졸업 후 동 대학원 미생물학과에 진학하면서 반세기 넘게 바이러스 연구에 천착해온 인물이다. 내과의사를 꿈꾸던 이 명예교수가 바이러스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당시 국내 환경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일본뇌염, 발진티푸스, 천연두 등 각종 전염병이 만연해 환자를 치료하려면 관련 분야의 지식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 명예교수는 ‘미생물 공부를 한 뒤 의사를 하자’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런데 시대는 그를 완전히 다른 길로 이끌었다. 1955년 시작된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 국무성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을 돕겠다는 취지로 서울대 의대 교수와 조교를 미네소타대 의대로 연수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제가 거기에 뽑혀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거죠. 두 달 동안 영어회화를 배운 뒤 서울 여의도 군용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1928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 월남한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회였다. 이 명예교수는 부족한 영어 실력을 밤샘 노력으로 극복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수업시간에는 칠판에 적힌 내용을 전부 옮겨 적고, 주말에는 미국 학생들의 노트를 빌려 다시 달달 외웠다. 그렇게 도미 후 만 4년 3개월 만인 1959년 12월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뇌염바이러스에 대해 쓴 박사 논문도 당시 저명 학술지에 게재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해 말 이 명예교수가 귀국할 때는 ‘동아일보’에서 그의 금의환향을 기사화할 만큼 국내 학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

    “하지만 당시 한국 연구 환경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어요. 서울대 연구실도 일주일에 몇 번씩 전기가 끊길 정도였죠. 그런 상황에서 특수현미경이 없으면 관찰조차 할 수 없는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등 해외 기관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해 자금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했죠.”

    이 명예교수의 말이다. 그의 한탄바이러스 관련 연구비도 미국 육군연구개발부 극동사령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미군은 연구비와 더불어 휴전선 지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미군 번호판이 붙은 지프차도 제공했다. 이 명예교수는 그 차를 타고 현장조사를 시작했고, 미국 유학시절처럼 밤을 지새우며 공부해 세계 유수의 연구진을 따라잡았다.

    고향 함경남도에서 장대높이뛰기, 110m 장애물 넘어뛰기 등 각종 육상 종목에서 학교 대표 선수로 활동했을 만큼 강한 체력과, “내 유전자는 실패를 거듭해도 하기 싫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고 할 만큼 굳건한 끈기가 연구의 밑바탕이 됐다.

    이 명예교수는 “마침내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예방 백신까지 개발해 ‘괴질’에 대한 걱정을 종식시켰을 때 학자로서 무척 뿌듯했다”고 밝혔다. 지금도 한탄강 일대 유행성출혈열 빈발 지역에서 복무하는 군인과 거주 민간인은 이 명예교수가 개발한 백신을 맞는다. 하지만 치료제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이 명예교수는 “살아 있는 세포에만 기생하고 이를 통해 증식하는 바이러스의 경우, 바이러스를 죽이려면 숙주까지 공격하게 돼 치료제 개발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어느새 아흔을 바라보는 그는 관련 분야 연구를 더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후학들의 노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최근 건강한 세포에는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표적항암제가 속속 개발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전한 거죠.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머잖아 바이러스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치료제도 개발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류의 삶이 또 한 번 크게 달라지겠죠.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이 분야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세계 연구 흐름을 주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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