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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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악마의 책 ‘나의 투쟁’ 이상 열기

히틀러 자서전 70년 만에 재출간…대규모 난민사태, 우파 득세와 맞물려 폭발력 갑절

  •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입력2016-01-18 10: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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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만에 다시 독일에서 출간됐다. 이 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컸다. 서점에 배포되기 전 이미 동이 났을 정도다. 영국 일간신문 ‘텔레그래프’는 1월 8일 독일어 원문으로 출간된 ‘나의 투쟁’을 사려는 선주문이 1만5000부 들어오면서 초판 4000부가 다 팔렸다고 보도했다. 온라인서점 아마존에는 정가 59유로(약 7만8000원)인 이 책을 170배 가까운 약 1만 유로(약 1320만 원)에 팔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재출간본 초판의 가치가 그만큼 높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방증이다. 아마존에서는 최저가 385유로(약 50만8000원)부터 거래됐다.
    1925년 처음 발간된 ‘나의 투쟁’은 히틀러가 바이에른감옥에 갇혔을 때 쓴 책으로, 나치 집권 시절 1200만 부 이상 배포됐다. 아리안 인종의 순수성을 주장한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등을 이 책에서 그대로 드러냈다. 대충 얼버무리거나 난해한 말로 이해하기 어렵게 쓴 게 아니라 공포정치 프로그램, 인종차별과 전체주의 실행계획, 세계 정복에 대한 야망 등 구체적인 계획까지 담았다. 그래서 이 책은 히틀러의 정치철학이 반영돼 나치주의의 경전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책의 저작권은 독일 바이에른 주정부로 넘어갔고 올해 1월부터 저작권이 만료돼 재출간이 가능해졌다. 다만 독일 정부는 지난해 히틀러의 저술에 대한 ‘무비판적 출간’을 전면 불허한다고 밝혀 주석 첨부 등 연구, 비판본 형식의 서적만 출판할 수 있다. 독일 현대사연구소(IfZ)는 저작권 만료를 염두에 두고 원본에 3500개 주석을 첨부해 연구와 비판본 형태의 ‘나의 투쟁, 비판본’을 발간했다. 780쪽 분량의 ‘나의 투쟁’은 IfZ의 비판적 주석이 붙으면서 전체 분량이 2000쪽으로 늘어났다.



    무너지는 ‘히틀러 시대의 굴레’

    비판적 해석이 달렸다고는 하지만, ‘나의 투쟁’이 인기를 끌자 찬반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유대인 대부분은 ‘나의 투쟁’ 재출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로널드 로더 세계유대인회의 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치 관련 책은 학술적인 목적에 한해 출판이 가능하고, 이미 학자들은 ‘나의 투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며 “논란을 일으키면서까지 재출간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유대포럼’의 레비 살로몬 대변인 역시 “어떻게 악마에게 주해(註解)를 붙일 수 있느냐”며 재출간을 비판했다. 독일의 일부 서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받을 상처를 고려해 판매를 거부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반면 요제프 슈스터 독일 유대인중앙위원회 위원장은 “‘나의 투쟁’ 비판본은 히틀러의 오류를 폭로하고 반(反)유대주의에 맞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독일 교육계에서 학생들에게 비판본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요제프 크라우스 독일교사협회 대표는 최근 비판본을 발췌해 만 16세 이상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고, 요하나 방카 교육부 장관도 1월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비판본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만행을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별도의 주석이 달린 비판본을 읽자는 주장이지만, 히틀러의 사상 자체를 금기시해온 오랜 관행에 비춰보면 상당한 변화다. 히틀러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오는 이유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독일인들에게 총통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들의 생각을 분석했다. 이 매체는 ‘히틀러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시각이 바뀌고 있다’며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의 시각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랫동안 ‘나치 전범’에 가위 눌렸던 독일인들의 생각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 영국 여론조사업체 유거브가 2015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는 히틀러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독일과 히틀러를 함께 떠올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독일과 연관된 사람 또는 물건을 묻는 질문(복수 응답 허용)에선 25%만이 히틀러를 떠올렸다. 이처럼 히틀러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다만 독일인들이 점차 ‘히틀러 시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전후 히틀러가 남긴 전체주의에 매우 민감했던 독일은 2006년 월드컵을 계기로 응원에 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경기장에서 국기를 흔드는 행위가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는 우려에 그동안 사용을 자제해왔다.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10년 전만 해도 독일에서는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심야방송 토론에서 이 주제를 놓고 각계 인사들이 장시간 토론을 벌일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지방선거 앞두고 극우정당 활개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의 생각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나의 투쟁’ 재출간이 난민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됐다. 지난해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독일로 유입된 난민만 100만 명이 넘는다. 독일은 유럽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경제상황이 나은 편이고, 특히 국력 등을 고려할 때 ‘맏형’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대규모 난민 수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독일 내에선 여전히 난민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다수 존재한다. 2015년 12월 31일 쾰른 등에서 난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집단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면서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더 악화됐다. 당장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페기다)’ 등 극우 시위대는 1월 9일 쾰른 대성당 주변에서 정부의 난민 수용 정책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반난민 정서는 현실정치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3월 바덴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와 9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베를린 주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이 지지율을 대폭 늘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비판적인 주석을 포함했다지만, ‘나의 투쟁’ 재발간이 극우 분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배경이다. 미국 일간신문 ‘뉴욕타임스’는 최근 ‘아리아인의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히틀러의 책이 또 다른 인종차별주의를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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