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1

2016.01.13

책 읽기 만보

큰 도둑은 사랑과 정의까지 훔친다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16-01-12 16: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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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척(盜·노나라 때 사람으로 9000여 명의 무리를 이끈 도둑)의 부하가 도척에게 물었다. “도둑질에도 길(道)이 있습니까.” “어디엔들 길이 없겠느냐.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맞히는 게 훌륭함(聖)이다. 먼저 들어가는 게 용기(勇)다. 나중에 나오는 게 의리(義)다. 될지 안 될지 아는 게 지혜(知)다. 고루 나누는 게 사랑(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장자’ ‘거협()’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기서 거협은 도둑질을 위해 ‘상자를 연다’는 뜻이다. 장자는 왜 성인도 아닌 도둑의 도를 이야기한 것일까. ‘장자’를 번역한 조현숙의 설명을 들어보자.
    “상자를 단단히 묶고 잠가두는 것은 도둑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큰 도둑은 상자째 훔쳐가면서 오히려 상자가 단단히 묶여 있지 않을까 봐 걱정합니다. 도둑들은 ‘사랑과 정의(仁義)’마저 훔쳐 도둑질의 도구와 노리개로 이용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성인은 사랑과 정의를 외치고, 지식인은 앎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결국 최고 지식인과 성인들은 세상을 훔치는 큰 도둑을 위해 상자를 단단히 묶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장자는 ‘천하(天下)’ 편에서 “세상이 혼탁해져 바른말 하기가 어려워졌다”며 “치언(言)으로 바꾸고” “중언(重言)으로 진실을 말하고” “우언(寓言)으로 폭넓게 말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치언’이란 글자 그대로는 앞뒤로 사리가 어긋나는 말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변화무쌍한 장자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가리킨다. 앞의 ‘도척’이야기에서 장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사랑과 정의를 만들면 도둑은 그 사랑과 정의까지 훔쳐가고, 혁대(허리띠) 고리를 훔친 사람은 사형을 당하지만 나라를 훔친 사람은 제후가 되고, 제후의 문 앞에 사랑과 정의가 내걸린다. 이렇게 도척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막을 수 없게 된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고로 “훌륭함과 앎을 잘라버려야 큰 도둑이 없어진다(故絶聖棄知 大盜乃止).”
    조현숙의 완역본 ‘장자’가 나왔다. 그의 ‘장자’ 공부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장자’를 처음 접하는 이도 쉽게 읽힌다는 데 있다. 도척 우화에서 ‘聖’을 ‘훌륭함’으로 옮기고 ‘仁義’를 ‘사랑과 정의’로 풀어 쓰는 식이다. 또한 문장을 존대체로 옮기고 대화체 글은 희곡식으로 구성해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을 살렸다고 한다.
    그동안 무엇이 최고의 ‘장자’ 번역본인지를 놓고 대체로 전문가들 의견은 ‘안동림본’과 ‘오강남본’으로 좁혀져 있다(‘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교수신문 엮음). 조현숙은 ‘옮긴이의 말’에서 안병주·전호근·김형석이 정리한 ‘역주 장자’를 저본으로 삼고, 안동림·김학주·오강남 번역본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장자’가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번역본이다.



    무업 사회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펜타그램/ 304쪽/ 1만5000원

    ‘청년 무업(無業)자’란 결혼한 것도 아니고 학교나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닌 채로 수입이 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15세 이상 35세 미만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단지 게으르고 근성이 없어서 일을 하지 않는 걸까. 일본의 잠재적 청년 무업자 수가 480만 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무업 사회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고 6명의 청년으로부터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듣는다.



    장정일의 악서총람
    장정일 지음/ 책세상/ 592쪽/ 1만7800원

    이혜숙·손우석의 ‘한국 대중음악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다루지만 사실상 ‘서태지 혁명’에 바치는 헌사나 다름없다. 장정일은 이 책을 읽고 ‘열정적으로 쓰인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까지도 열정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116편의 리뷰에는 이경분의 ‘망명 음악, 나치 음악’, 한대수의 ‘영원한 록의 신화 비틀스 vs 살아 있는 포크의 신화 밥 딜런’ 등 ‘악서(樂書)’ 174권이 등장한다.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212쪽/ 1만4500원

    구약성서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작가가 마치 무성영화 변사처럼 전지적 시점으로 내레이션을 해나간다. “네가 아우를 죽였구나.” “네, 죽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주이십니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의 한 대목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역사ⓔ4
    EBS 역사채널ⓔ 지음/ 북하우스/ 384쪽/ 1만5800원

    5분 분량의 방송에서 역사의 핵심 장면을 압축적으로 전달해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EBS ‘역사채널ⓔ’ 네 번째 책이 나왔다. 2008년 불탄 국보 제1호 숭례문을 중심으로 국보 지정의 유래를 살피고, 함북 경흥 부근 두만강 하구의 작은 섬 녹둔도가 일제강점기 남의 손에 넘어가버린 사연, 강제징용 한국인의 아픔이 새겨진 일본 하시마섬의 비극 등을 다뤘다.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전병길 지음/ 생각비행/ 384쪽/ 1만5000원

    1897년 태어나 연간 1억 병이 생산되는 국민 소화제 활명수의 탄생 스토리와 동화약방에서 동화약품으로 발전한 기업사를 들여다본다. 1976년 ‘경향신문’에 실린 글에서 농촌지역 어린이가 콜라를 처음 접하고 엄마에게 “배도 아프지 않은데 왜 활명수를 주느냐”고 했다는 에피소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활명수’로 부르던 시절 등 한국 근현대사의 흥미로운 장면들을 활명수와 함께 소개했다.



    만물과학
    마커스 초운 지음/ 김소정 옮김/ 교양인/ 468쪽/ 1만8000원

    우리 몸은 100조 개의 ‘세포’로 돼 있고 매일 ‘호흡’을 통해 태양을 먹는다. ‘전기’ ‘컴퓨터’ ‘돈’ ‘자본주의’의 공통점은 ‘문명’을 움직인다는 것. 빨리 달릴수록 시간은 천천히 가는 것을 설명한 ‘특수상대성이론’, 모든 은하의 중심인 ‘블랙홀’ 등 과학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개념어 중심으로 정리했다. 인간은 왜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됐을까. 어떻게 아무것도 없던 데서 우주가 생겨났을까. 더는 묻지 말고 책을 읽어라.



    칼날 위의 역사
    이덕일 지음/ 인문서원/ 328쪽/ 1만7000원

    구한말 고종은 44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꿈꾸다 결국 망국을 초래했다. 망국의 원인으로는 시대 흐름에 역행한 것과 인재 발탁에 실패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한심하기로 따지면 임진왜란 때 도망간 선조와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다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던 선조도 그에 못지않다. 저자는 조선시대 역사 42개 장면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읽는다.



    덕후감
    김성윤 지음/ 북인더갭/ 324쪽/ 1만5000원

    팬픽, 팬아트, 멤버놀이, 걸크러시로 나타나는 소녀들의 성적 판타지란 무엇일까. ‘삼촌’이라는 이름으로 귀환한 신세대 남성들은 누구인가. 영화 ‘써니’ ‘건축학개론’ ‘미생’이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인 이유. 영화 ‘국제시장’과 ‘변호인’을 둘러싼 해석 전쟁에서 왜 박정희와 노무현의 유령이 어슬렁거리는가. 사회학자로서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 있는 대중문화 현상을 분석한 글로, 여러 잡지에 기고했던 내용을 대폭 수정해 재구성했다.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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