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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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요불급’하지 않은 음악

[미묘의 케이팝 내비] 안전하게 음악과 춤 즐길 환경 조성해야

  • 미묘 대중음악평론가

    입력2022-11-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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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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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에 따른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다. 행사와 공연, 음반 발매가 연기되거나 취소된다는 소식이 줄줄이 들려온다. 문화센터 노래교실마저 중단된다고 한다. 마치 노랫소리가 조금만 들릴 법하면 일단 멈추는 분위기 같다. 특히 이태원이 위치한 서울 용산구는 12월 31일까지 애도 기간을 연장해 “모든 불요불급(不要不急)한 행사”를 중단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인디신을 중심으로 반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음악을 멈추라는 것은 곧 생계를 멈추라는 뜻과 같다. 특히 긴 시간을 두고 미리 기획해 진행하는 공연을 갑작스레 취소할 때는 관람객 환불 외에도 대관료, 장비 임차료, 개런티 등 수많은 명목에서 금전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문화예술계에서 다른 영역보다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 대중음악 분야인지라, 겨우 숨통이 트일 만한 시점에 다시 찾아온 빙하기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경함 없는 음악의 힘

    국가 애도 기간은 음악인의 생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이 음악과 유흥에 관한 인식의 문제임은 희생자들을 두고 “그곳에 왜 갔느냐”고 비난하는 일각의 목소리에서 황폐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공연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아티스트까지 있다. 경찰은 참사가 일어난 10월 29일 밤의 교통 통제나 시민안전보다 마약 단속 의지나 ‘이태원 압사 수사’에 더 열의가 있어 보인다. 우리 사회의 일부는 음악과 춤을 문화가 아닌 ‘불요불급’하고 방탕한 것으로 규정하고 낙인찍고자 한다. 그렇기에 즐기려는 이는 불온함을 의심받아 마땅하고, 희생을 당한들 떳떳하지 못하며, 사회적 참사가 있을 때 불경하게도 음악 소리를 울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아니다. 이것은 ‘애도를 강요’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다. 음악이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게 해주는 도구나 즐거운 시간만의 동반자가 아님을. 음악은 인류사의 처음부터 인간의 고통, 슬픔과 함께해왔다. 음파가 가슴을 울려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박자를 맞추거나 음율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확인함으로써 공동체의 아픔을 견디게 했다. 그것 어디에도 불경함은 없다.

    한류 이후 서울을 소개하는 해외 책자들을 보면 이태원은 서울의 ‘진짜 밤’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소개되곤 한다. 특히 고도로 상업화된 홍대 앞에 비해 성소수자와 외국인을 포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태원은 좀 더 분방하고 생기 넘치는 지역으로 많은 이에게 해방구 역할을 해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비트 위에서 타인과 함께하고, 삶을 축복해왔다. 그것 어디에도 불온함이나 ‘불요불급’이라는 말을 감히 가져다댈 구석은 없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일은 음악과 춤을 멈춤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가지고 누려야 했던 권리, 즉 안전하게 음악과 춤을 즐길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가능하다. 케이팝 스타를 동원하는 국가 행사와 룸살롱 취객의 가무 이상의 의미가 음악에는 있다. 삼가 156명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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