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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등급 인민 굴레 벗고 성공한 아들…목숨 걸길 잘했다”

납북 어부 이재근 “몇이나 살아 있을까…남은 동료 눈에 밟혀”

  •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51등급 인민 굴레 벗고 성공한 아들…목숨 걸길 잘했다”

납북 어부 이재근 씨. [지호영 기자]

납북 어부 이재근 씨. [지호영 기자]

이재근(84) 씨는 2000년 납북 어부 최초로 한국에 생환했다. 1970년 서해에서 조업 중 북한군에 납치된 지 30년 만이었다. 한국에서 조실부모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북한은 차원이 다른 ‘생지옥’이었다. 북한 당국은 그를 남파 간첩으로 혹독하게 훈련시키곤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팽했다. 이씨는 한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최하층 노동자로 살았다. 차별과 굶주림에 못 이겨 1998년 탈북, 2년 가까이 중국에서 전전하다 고국 품에 안겼다. 이씨를 직접 만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들었다.


“남파 간첩 돼서라도 고향에 가야지”


“아이고, 참…. 말도 못 해요.” 

납북과 북한에서 삶을 묻자 연신 탄식했다. 지금도 납북된 날인 ‘1970년 4월 29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부산 선적 어선 봉산 22호에 타고 있었다. 새벽 2시 30분쯤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나타났다. 순식간에 어선 갑판으로 건너온 북한군은 선원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위협했다. 북한 경비정은 봉산 21·22호(두 배가 한 조로 움직이는 쌍끌이 어선)와 선원 27명을 납치했다.

“고된 간첩 훈련에 죽어나간 사람들”

선박과 선원 20명은 같은 해 11월 29일 한국으로 송환됐다. 이씨를 비롯한 7명은 그대로 억류됐다. 그는 “젊고 건강한 사람을 추려 남파 간첩으로 써먹을 계획이었던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납치 후 북한 당국은 나를 중앙당 정치학교에 입학시켰다. 졸업하면 엘리트로 대우받는다고 하더라. 실상은 남파 간첩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사격·수영·지형학·사상교양 등 다양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에 죽은 사람도 있다. 청진 앞바다에서 침투 훈련을 했는데, 보트로 30분가량 걸리는 먼바다에 빠뜨리고 육지로 헤엄쳐 오라는 식이었다.” 

남파 간첩이라니 아찔했겠다. 

“도리어 ‘옳다구나’ 싶었다. 일단 간첩으로 한국에 가 자수하면 될 일 아닌가. 고향에 갈 방법이 생긴 것이다. 졸업이 다가오자 중앙당 지도원이 ‘건강과 기술은 좋은데 사상적으로 병이 있다’며 사회로 배출한다고 했다. 완강하게 대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함경남도 함주군 선박전동기공장 선반공(旋盤工), 양수기 운전공으로 30여 년간 일했다. 1987년 노동당에 입당했지만 늘 감시 대상인 2등, 3등 인민에 불과했다.”


“가마솥에 사람 머리가…” 식인(食人) 횡행 ‘고난의 행군’


납북자 차별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이씨의 아들은 학업 성적이 우수했지만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이씨는 “북한 당국은 인민을 52등급으로 나눠 차별했다. 나는 그중 꼴찌에서 두 번째인 51등급이었다. 아비 탓에 아들은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없었다”며 “아들 덕에 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한국행을 결심한 큰 동기는 바로 아들”이라고 말했다. 

납북자 자식은 대학도 못 가나. 

“아들은 반에서 곧잘 1등을 했다. 김일성종합대나 김형직사범대 등 좋은 학교를 지망했다. 당시 북한에선 모집지도원 허가를 얻어야 대학 원서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아들은 허가를 못 받았다. 매년 지도원을 찾아가 통사정해도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5년째 되는 해, 내가 ‘이러려고 붙들려 왔느냐’고 난리를 쳤다. 결국 지도원이 석탄대, 광산대 지원을 제안했다.” 

아들의 반응은. 

“아들에게 말했더니 ‘광산·탄광에 내 뼈를 묻을 수 없다.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단념하더라. 원래 나는 북한에서 맡은 일을 하다 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가야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대학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씨 일가의 한국행은 ‘교육열’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95~1999년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극심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수십만 명이 아사했다. 남한 출신에게 고난의 행군은 더 가혹했다.

“똥이 과자·빵으로 보여”

직접 겪은 ‘고난의 행군’은 어땠나. 

“북한 주민들은 농촌 사는 친척에게 음식을 얻어 연명했다. 나는 친척이 없지 않나. 특히 먹을거리가 동나는 봄은 심각했다. 일주일가량 굶으니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눈이 뒤집혀 사람 똥이 과자, 빵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과나무에 핀 꽃부터 강아지 사체까지 안 먹은 게 없다. 심지어 어떤 이는 식인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식량난이 심각했다.” 

식인한 사람이 있다고? 

“1997년 사람을 잡아먹다 체포된 이를 직접 봤다. 젊은 시절 당 간부를 지낸 사람의 집에 사회안전원들이 들이닥쳐 윽박지르고 있었다. 이웃들이 모여 웅성댔다. 나도 구경하다 그 집 부엌에 김이 펄펄 나는 솥이 있기에 뚜껑을 열어봤다. 사람 머리가 끓고 있어 깜짝 놀랐다. 전직 당 간부가 오랫동안 굶다 눈이 뒤집혀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거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들을 이르는 말)를 잡아먹은 것이었다.” 

1998년 8월 18일 함주군의 집을 나섰다. 탈북을 마음먹은 것이다. 아내와 아들은 그보다 먼저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씨는 9월 1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닿았다. 이씨 일가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2000년 7월 23일.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갈 방법을 찾느라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이씨는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해 곧 한국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 영사관 직원이 ‘한국에 세금 낸 적 있느냐.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느냐’고 홀대할 때 참 서럽고 막막했다”며 “다행히 한국인 목사와 언론인의 도움으로 고국으로 올 수 있었다. 30년 만에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회상했다.


납북으로 생이별한 첫 아들


이씨가 한국에 생환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남은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자 손을 내저으며 “내 나이 이제 여든넷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나. 다만 우리 아들이 미국 시민권도 마저 따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2000년 한국 입국 당시 20대 초반이던 아들은 이제 50대 가장이 됐다. 명문 사립대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다녔다. 영주권자로 미국에 정착해 번듯한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이씨는 “아들이 그 나름 성공해 제 몫을 잘하고 있다.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한 보람이 있다”고 했다. 아들 자랑에 한창이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생이별한 또 다른 아들 때문이란다. 자세한 사연을 묻자 이씨가 이야기를 풀어냈다. 

“1961년 스물두 살 나이로 첫 아들을 얻었다. 아이 엄마는 출산 후 산후병으로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형편이 어려워 우유조차 살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이웃 소개로 서울 신당동에 사는 이에게 아이를 맡겼다. 10년 정도만 키워주면 양육비를 치르고 아이를 돌려받겠다고 약속했다. 1970년 북한에 끌려가 모두 허사가 됐다. 한국에 돌아와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비 노릇을 못 했지만 생부로서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1968년 10월 인천항으로 귀환한 납북 어부와 어선들. [동아DB]

1968년 10월 인천항으로 귀환한 납북 어부와 어선들. [동아DB]

“김정은 정권, 언제 망해도 망한다”

이씨는 북한에 납치돼 아들과 생이별했다. 비극적 가족사는 이씨만의 일이 아니다. 통일부는 6·25전쟁 휴전 후 3835명이 납북됐다고 추산했다. 이 중 3319명은 귀환했고 516명이 억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부 457명, 군경 30명, 1969년 KAL기 피랍자 11명, 기타 18명 등이다(이상 2014년 기준). 이씨도 2000년 자신이 신원을 파악한 납북 어부 생존자 32명의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북한에 남은 납북 어부를 두고 그는 “나는 한국에 살아 돌아왔지만 남은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몇이나 살아 있을지…. 이제 (속상해) 그런 (납북 어부에 대한) 말도 안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정은 정권이 10년, 20년 더 갈지 모르겠지만 언제 망해도 망한다”고 덧붙이는 이씨의 목소리에 설움과 노여움이 묻어났다.





주간동아 1280호 (p14~16)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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