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76

2021.02.05

“판사 아닌 정권 편드는 대법원장, 판사들은 괴롭고 힘들다”

[허문명의 Pick] 文 정부 비판하다 사표 쓴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②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01-3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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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표를 낸 김태규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허문명 기자]

    사표를 낸 김태규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허문명 기자]

    김태규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는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촛불정신을 받들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니, 그럼 태극기 세력이 집권하면 태극기 정신을 받들어야 하나. 그런데 법원 안에서는 아무도 이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보다는 지금 법원이 균형을 많이 되찾긴 했지만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총평을 해달라. 

    “김명수 원장의 인품, 인자함은 다 인정하는데, 기관 수장한테 바라는 구성원의 마음이란 건 대개 ‘방패막이가 돼달라’는 것 아닐까. ‘판사들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헌법과 원리에 따라 재판만 하라’ 이런 대법원장 말이다.” 

    -이전에는 그런 대법원장이 있었나. 

    “이전 원장들은 사회가 이렇게 극도로 분열되기 전이었으니까 그럴 필요조차 없었을 거다. 세상이 이렇게 편이 갈리고 정치적·이념적으로 불화가 심화되다 보니 그런 요구가 더 커졌다고 본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법원장이 판사들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촛불정신을 받들라는 대통령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당이 판사를 공격하거나 일반 시민이 공격할 때도 대법원장이 막아줘야 한다. 더구나 정권 관계자나 여당 정치인이 공격하면 더 막아줘야 하지 않나. 김명수 원장은 여당 정치인이, 또 정권 지지자가 판사 이름을 적시하면서 공격하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러면 판사들은 그냥 광야에 혼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나처럼 ‘또라이 짓’을 하든지(웃음). 판사들이 공격당할 때 제대로 된 대법원장이라면 ‘나를 공격하라, 법관은 공격하지 마라’고 했어야 한다. 

    지금 판사들은 정말 힘들고 외롭다. 광화문 집회를 허가한 ‘박형순 금지법’을 만든다고 여당 정치인들이 달려 나올 때도 박 부장판사를 옆에서 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판사들 의견을 듣는다는 전국법관대표회의도 법원이 완전히 정권 편이 되니 모임 자체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양심보다 법이 우선이다

    -최근 쓴 ‘법관이 양심을 핑계로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려 들면 법치는 막을 내린다’ 제하 글을 인상 깊게 봤다. 지금 판사들의 판결문을 보면 법보다 국민정서법을 우선시하는 것 같을 때가 많은데,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국 사태’를 비롯해 이번 정부 들어 전반적으로 법원이 정권 눈치를 보는 일이 많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판사가 법을 무시해도 되나. 너무 화가 나 쓴 글이었다. 법관들이 ‘양심’ ‘양심’ 하는데 순서가 잘못됐다. 우선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양심은 보충적이고 보완적인 거다. 양심-헌법-법률 순서로 판단한다면 그건 판사가 아니다. 국민 정서, 국민 눈높이에 맞춰서 한다고 명분을 내거는데,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면서 그런 식으로 재판할 것 같으면 일반인과 판사가 뭐가 다른가. 

    다분히 나의 주관적이고 자조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당당하게 직을 걸고 소신을 펼쳤던 선배들과 달리 사명감, 정의감을 접어두고 법원 안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판사들이 있다. 법조 시장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직을 그만두는 순간, 거친 황야로 던져져야 하는 현실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판사들이 왜 그렇게 여론에 민감한가. 

    “그만큼 외부의 영향이 세다. 너무 겁을 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위협’은 실체가 없다. 찾아와 칼을 휘두르지도 않는데 댓글이나 여론을 의식해 자꾸 양보하면서 물러서는 판결을 내리니까 그 사람들이 판사를 더 우습게 보고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거다. 판사는 정치인처럼 표를 얻는 직업도 아니니 정치적으로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나라가 잘 되려면 공무원들 심지가 굳어야 한다.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안정감이 드는 이유는 관료들이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법원 내부에 응원군이 없었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글을 올린 후 몇몇 동료 판사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럼 잠시 위안을 받아 아내한테 얘기하면 아내는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그럼, 자기들도 말 좀 하지’라고 했다(웃음). 대한민국 법관 3000명 중에서 나 같은 사람이 100명만 있다면 법을 함부로 운영하지 못할 거다.” 

    -왜 말들을 안 할까. 

    “우선은 판사라는 직업 자체가 한계가 있어 보인다. 판결문으로만 말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특히 우파적 성향의 판사가 이런 원칙에 충실하다. 오히려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만들고 행동에 나선다. 두 번째로는 보이지 않는 주위 시선을 꺼리는 측면도 있다. 판사 하면 공정성이 기본이니까, 정치적으로 자신이 어느 한쪽에 편향돼 있다고 낙인찍히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인사상 불이익 때문은 아닌가. 

    “그런 건 없다. 법관은 탄핵 아니면 파면을 못 시킨다. 헌법이 보장하는 가치다. 법관에 대한 최고 징계라고 해봐야 ‘정직’ 정도라서 인사상 불이익 측면은 일반 공무원과 다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법치가 무너지고 있는데 집단행동이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판사들은 기본적으로 시류가 정해지는 대로 가치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나쁘다고 하니 나쁜 게 맞는가 보다 하면서 내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판사들이 기본적으로 책상물림들 아닌가. 평생 고시 공부만 하다 바로 법관이 되고 법조인이 돼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 없이 살다 기록과 만난다. 세상 보는 눈이 식당 아주머니나 택시기사만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 경험을 많이 했나. 

    “내가 시장 가치나 돈을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느낀 게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지 4년 됐을 때다. 직원들 월급을 못 맞출까 봐 날마다 줄담배를 두세 갑씩 피우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자영업자와 똑같았다. 쌍욕도 듣고 모욕도 당하면서 ‘나도 별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시각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변했다고 할까. 이상한 판결이 나오고 법치가 무너지는 상황을 접할 때면 ‘국민이 얼마나 판사를 우습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버는 게 힘들다는 것 알게 된 변호사 시절

    이 대목에서 그의 개인적 삶이 궁금해졌다. 

    -연세대 법대 85학번이다. 대학 때 운동권이었나. 

    “붙잡히거나 감옥에 간 건 아니지만, 사회 분위기상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2학년 때는 과대표로 학생회 활동도 하고 전방입소거부운동도 했다. 복학해 수업거부운동을 할 때는 복학생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은 다 읽었고, 가톨릭 신자라 해방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법대는 왜 갔나. 

    “순전히 취직이 잘될 것 같아서 갔다. 판검사 되는 것은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 복학해 철이 들고 친구들이 졸업 후 제 갈 길 가는 걸 보면서, 그리고 1990년대 들어 경제가 안 좋아져 취직자리가 많이 줄어들다 보니 별 고민 없이 사법시험을 봤다.”

    -연수원 졸업하고 바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왜 임관을 안 했나. 

    “연수원 2년 차 때 외환위기가 닥쳐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부친도 돌아가셔서 공부를 거의 못 했다. 임관을 포기하고 부산으로가 로펌에서 1년 동안 일하다 울산에서 개업해 4년간 변호사로 일했다. 이혼 사건부터 민사, 형사 다 해봤다. 

    그러다 평소 꿈이던 미국 유학(미국 인디애나대 로스쿨)을 가느라 사무실을 접었다. 1년 4개월 뒤 돌아와 다시 사무실을 열까 고민했는데, 친한 후배가 헌법재판소 연구관 경력직 공모가 있다고 알려줬다. 1년가량 하다 보니 연구관이라는 게 주로 재판관 보조업무를 하고, 내가 헌법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별 재미를 못 느꼈다. 마침 판사 개방형 공모가 나와서 응모해 판사가 됐다.” 

    -왜 판사직을? 

    “법조인이라면 누구든 되고 싶어 하지 않나. 당시 40대 초반이었는데 검사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변화가 많은 삶이었다. 

    “안주하고 익숙해지면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지법, 부산고법, 창원지법, 대구지법에서 일했다. 주로 민사와 형사를 담당했다.” 

    -지역법관으로 살았는데.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애초 법조인으로서 시작을 울산에서 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아이들 교육도 있고 모든 게 서울 중심이니까 지역법관은 아웃사이더다. 서울과는 완전히 결연하겠다는 마음으로 신청했다.” 

    -페이스북에 지역법관을 ‘서자(庶子)’라고 표현했던데 

    “‘인싸’(주류)가 아닌 ‘아싸’(비주류)라는 뜻이다. 법원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성적으로 바로 임관한 사람, 가능하면 서울대, 그것도 법대, 그리고 임지(任地)는 서울을 선호하지 않나. 그것의 반대는? 서울대도 아니고 바로 임관된 것도 아닌, 품계로 따지면 4두품 이하인 나 같은 사람 아닌가(웃음). 법원 행정처나 대법원 판사로 가는 길을 아예 접으니 마음이 편해 좋았다. 우리 용어로는 ‘망실(亡失) 법관’이라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너무 편했다. 그냥 묵묵히 재판만 하면 되니까.” 

    -망실 법관? 

    “우리 업계 용어다. 잊힌 법관, 존재감이 별로 없는 투명 법관이라는 뜻이다. 부산에서 형사 단독 할 때가 정말 내 인생 황금기였다.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고. 서울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을 맡으면 심리적 부담이 큰데 그럴 일이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일을 즐기면서 했다. 승진을 포기한 공무원은 무서울 게 없다고 하지 않나.” 

    -판사 조직이 워낙 ‘엘리트 조직’이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이 클 것 같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반골 기질이 생기기도 한다. 서울대 나오고 바로 임관한 사람끼리도 서로 비교하면서 자괴감을 토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가진 게 많은데 왜 저럴까. 나는 그 모든 리그에서 빠져 있으니 마음 편하게 일했다.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법관이 대부분 명예나 평판으로 살아가는데 남한테 안 좋게 비칠까, 혹여 구설에 휘말릴까 조심하느라 말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만 포기해도 나처럼 할 말 다하면서 살 수 있는데 말이다.”


    정치세력이 바뀌었다고 사법부까지 흔들려서야

    -이번에 사표를 낸 고법 부장판사가 많다. 

    “퇴직 전 3년 동안 일했던 기관의 사건을 퇴직 후 3년 동안 수임할 수 없게 한 ‘3년 제한 규정’ 탓이 가장 크다. 게다가 법원장을 투표로 뽑는 법원장 추천제가 실시되고 특정 학회 출신 판사들이 요직을 독식하는 상황에서 열심히 일해 봐야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당신은 왜 사표를 썼나. 

    “미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판사라는 직업이 자랑스러웠고. 다른 행정부 사무관이나 서기관을 만나면 ‘판사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자기 일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라는 소리도 듣고 살았다.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 이번 정권 들어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정치 세력이 바뀌자 법원이 공격을 당하는, 유사 이래 처음인 상황을 겪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바람이 불 때까지만 해도 설마 법원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세상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았다. 일에 대한 염증, 세상에 대한 환멸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 50대 중반이라 다음 삶을 생각해볼 때도 됐고.” 

    -앞으로 계획은? 

    “울산에서 변호사를 할 예정이다. 대개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하면 모드 전환이 잘 안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바로 할 자신이 있다(웃음). 인생 별거 없더라. 한때는 이민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이 나라에 자유가 없으면 내가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개업하고 직원 구하는 일로 고민이 많다.” 

    김태규 부장판사는 솔직담백한 성격에 무엇보다 헌법정신이 투철해 보였다. 사법부는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보루다. 그와 헤어지면서 또 한 사람의 아까운 법관이 법원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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