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3

2020.06.12

이천화재 책임 밝혀줄 증언 이어져도 경찰은 ‘깜깜이 늑장’ 조사

  •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입력2020-06-09 15: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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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 물류창고 시공사 관계자, “한익스프레스가 매주 현장에서 업무 지시”

    • 유가족, “설계 변경으로 화재 발생…발주사가 모를 리 없다”

    • 유족은 장례 못 치르고 있는데 경찰은 “언제 조사결과 나올지 장담 못 해”

    • 한익스프레스, “건설관리는 감리업체에 모두 일임했다”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감식 현장과 발주처 한익스프레스 로고.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감식 현장과 발주처 한익스프레스 로고.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도의적 책임만 통감할 뿐”이라던 ㈜한익스프레스의 당초 입장이 무색하게 됐다. 경찰이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와 관련해 “발주처(한익스프레스)와 시공사(㈜건우)가 공사 기간을 줄이려 시도했다고 판단할 근거들을 확보했다”고 밝힌 가운데 “사고 당일에도 한익스프레스 관계자가 공사 현장에 나와 공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기로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놀랄 정도로 총체적인 안전관리 부실 있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물류창고 발주사인 한익스프레스 측 관계자 2~3명은 매주 수요일, 현장에서 진행된 ‘공정조율회의’에 참석했다. 화재가 난 4월 29일도 수요일이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시공사인 건우 관계자가 “화재 당일 오후 2시에도 공정회의가 (예정돼) 있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돼 있다. 이 관계자는 “점심 먹고 회의를 준비했다”며 “(한익스프레스 관계자는 평소) 공사 순서를 바꿔 우선순위를 정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화재 원인이나 책임자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경찰 수사 내용 중 공개된 부분은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이 6월 1일 열린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한익스프레스 직원을 포함, 관련자 80명 이상을 조사해 17명을 형사입건했다”며 “놀랄 정도로 총체적인 안전관리 부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이 거의 전부다. 

    이천 물류창고 공사를 발주한 한익스프레스는 한화솔루션을 비롯한 한화 계열사를 주요 고객으로 둔 운송물류업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 김영혜 씨와 김씨의 아들 이석환 한익스프레스 대표이사가 각각 2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3월 24일 기준). 지난해 매출 5773억 원, 영업이익 119억 원을 거둔 견실한 회사다. 

    한익스프레스는 축구장 10개 면적에 달하는 3개 동짜리 물류창고(연면적 7만7274m²) 공사를 건우 측에 맡겼다. 지난해 4월 1일 공사를 개시해 올해 6월 30일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감기한을 두 달여 앞두고 B동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3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했다. 



    이번 사고는 40명이 사망한 2008년 1월 이천 냉동창고 화재를 연상케 한다. 화재가 발생한 지역이 이천으로 같은 데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망한 산업재해라는 점에서도 두 사건은 많이 닮았다. 2008년 사고 때는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는데, 현장에 인화성 물질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매주 현장 나왔어도 ‘화재 위험 주의 조치’ 몰랐다?!

    5월 1일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5월 1일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이번에도 유증기(기름이 기화해 생긴 증기) 폭발이 화재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증기는 단열재로 쓰이는 우레탄폼을 발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우레탄폼 발포 작업을 할 때는 불꽃이 튀는 용접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유가족 변호를 맡은 법률사무소 마중의 김용준 변호사는 “현장에 있었던 작업자들이 사고 당시 우레탄폼과 도장 작업으로 유증기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용접 작업이 함께 진행됐다고 증언했다”며 “화재 전날 찍은 사진과 화재 발생 후 찍은 사진을 비교해 새로 용접한 곳들을 찾아내면 명백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우 측은 화재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이후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심사·확인’ 제도가 도입됐기 때문. 위험한 작업장 또는 장소에 기계 및 설비를 설치하는 경우 시공사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하 공단)에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공단은 지난해 5월과 올해 1, 3월 세 차례에 걸쳐 건우 측에 화재 위험이 있다고 알렸다. 

    해당 사실을 건우로부터 보고받았다면 한익스프레스 또한 처벌 대상이 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단에서 건우에 전달한 화재 위험 주의 조치를 발주사가 알고 있었다면 재판에서 형량에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한익스프레스 측이 매주 수요일 현장에 나와 건우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공단이 세 차례나 내린 화재 위험 주의 조치를 보고받지 않았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유가족은 화재 발생 당시 설계도면 변경으로 인한 작업이 이뤄졌다는 점을 토대로 한익스프레스의 책임을 묻고 있다. 박강재 전 이천 화재 유가족 대표는 “지난해 9월 설계도면이 바뀐 것으로 안다”며 “화재가 난 B동 지하에 사무실을 만드는 과정에서 냉기가 스며들지 않게 단열 작업이 필요했고, 사고 당일 그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발주처의 허락 없이 설계도면이 변경될 순 없다”고 강조했다.

    냉동창고 때와 달리 경찰 수사는 ‘거북이’ 걸음

    이천 화재 참사 유가족은 이천 시내에 차려진 합동분향소에 영정을 안치한 채 진상 규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사망자 대부분이 아직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경찰은 ‘깜깜이 늑장 수사’를 고집하고 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 이천화재수사본부 관계자는 “형사 입건된 17명 중 한익스프레스 직원이 있는지, 어떤 혐의가 적용될지 언급할 수 없다”며 “언제쯤 수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때는 일주일 내 중간 수사 결과가 나오고 책임자가 구속됐는데, 이번 사고는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결과가 발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표는 “제대로 된 수사 결과를 얘기해주지 않는데, ‘그럴 거면 브리핑을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천 냉동창고를 발주한 한익스프레스 측은 “시공사로부터 화재 위험 조치를 받은 사실을 보고받거나, 공사 일정을 앞당긴 적이 없다”며 “건설관리는 감리업체에 모두 일임했다”고 밝혔다. 다만 “매주 현장 회의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고만 받았을 뿐 업무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40명 사망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도 벌금형에 그쳐
    발주처 책임 묻기까지는 산 넘어 산


    2008년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에서 발주처 ㈜코리아2000과 이 회사의 공모 대표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각 200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인지했음에도 안전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을 벌금형으로 물은 것이다. 당시 시공사가 코리아2000의 계열사로, 발주처와 시공사가 사실상 하나였기 때문에 발주처 책임이 규명될 수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공 대표가 매일 업무 보고를 받고 수시로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번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도 발주처에 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한익스프레스가 화재 위험성을 알고 있었거나, 공사기한을 앞당겨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게 했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처벌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2007~2016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형사재판(5109건) 중 징역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0.5%에 불과하다. 66.8%는 벌금형을 받았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 ‘김용균법’ 적용 안 돼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인 2019년 1월 전면 개정되면서 원청이 안전관리를 허술하게 해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벌금 상한선이 1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대폭 상향됐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 작업을 하다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사건 이후 원청의 안전 책임 의무가 강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물류창고 화재는 전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즉 ‘김용균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고용노동부 산재예방지도과 관계자는 “김용균법은 이 법이 시행된 올해 1월 16일 이후 계약된 공사부터 적용된다”고 밝혔다. 한익스프레스가 단순 발주처를 넘어 공사 진행에 관여하는 원청에 해당한다고 인정되더라도, 한익스프레스가 건우와 이천 물류창고 신축 계약을 한 것은 2019년이라 김용균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한익스프레스가 현장 지휘·감독을 직접 해온 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처벌 받을 수 있다”며 “2013년 여수 대림산업 공장 사고에서 법원이 발주사에 산안법 위반 책임을 물은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어 “다만 발주사가 처벌받은 판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인재(人災)를 끊어내려면 검경 및 사법부의 좀 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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