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경의 ON THE STAGE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를 배반한 제자

연극 ‘단편소설집’

  •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9-05-10 17: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스승과 제자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만 그치는 관계가 아니다. 마치 가족처럼 사랑과 공경이라는 미덕이 요구된다. 이 모순적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는 연극 ‘단편소설집’이 2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 

    ‘단편소설집’은 현재 미국에서 탁월한 극작가로 손꼽히는 도널드 마굴리스(65)의 작품이다. 무명이던 마굴리스는 이 작품으로 1997년 퓰리처상 후보에 올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단편소설집’ 서문에 ‘모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앗아간다’는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며 작품을 시작한다. ‘쪽(藍)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동양적 사고와는 결이 다르다. 청출어람은 언젠가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는 독려의 의미가 강하다.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

    문예창작과 교수인 루스 스타이너(전국향 분)는 자타가 공인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작가로서 얻은 성공을 기꺼이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써 존경받는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김소진 분)은 6년간 가족, 비서, 친구, 동료처럼 스승인 루스를 보필하며 그의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리사의 데뷔작이 절찬리에 출간되자 누구보다 루스는 자신의 성공처럼 기뻐한다. 허나 성공에 눈먼 리사는 스승 루스가 가슴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사랑 이야기를 차기작 소재로 삼아 집필에 박차를 가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스는 “예술창작 과정에도 최소한의 윤리성과 책임이 있다”며 리사에게 항의한다. 그러나 리사는 “예술가의 신념이자 의무”라며 스승의 충고를 귀 담아 듣지 않는다. 

    배우의 대사, 표정, 몸짓으로만 팽팽하게 전개되는 작품을, 그것도 국내 정서와 거리가 있는 번역극을 3시간 동안 관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 전국향이 선사하는 혼신의 열연 덕에 객석은 한 치의 동요도 없다. 이곤 연출은 ‘아낌없이 주고 아름답게 퇴장하는 기성세대’와 ‘위세대를 공경하며 성공적으로 등장하는 차세대’라는 세대교체의 시대적 함의를 제시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