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4

2015.11.23

눈보라 맞으며 생명 끝나는 날까지

된서리에 피는 아욱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5-11-23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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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 맞으며 생명 끝나는 날까지
    식물 한살이에서 큰 갈림길은 서리다. 그것도 된서리. 여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피고 지는 웬만한 꽃들도 서리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이를테면 오이, 호박 같은 작물은 서리가 내리면 동작 그만! 잎은 시들어 말라버리고 더는 꽃을 보기 어렵다. 고추, 가지 역시 마찬가지. 된서리를 맞고 나면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된서리는 웬만한 식물한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그로기 상태에서 다시

    이 된서리에도 강한 채소가 있다. 배추는 영하 4~5도를 견디고, 상추 역시 추위에 강한 편이다. 시금치는 혹독한 겨울을 로제트 상태로 난다. 밀, 보리 역시 추운 겨울을 난다. 하지만 된서리를 맞고도 꽃을 피우는 식물은 아주 드물다. 배추, 상추, 밀, 보리는 겨울을 나고 봄에 꽃이 핀다. 자연에서조차 늦가을 된서리를 견디는 꽃으로는 산국과 개망초 정도다.

    그런데 작물로는 아욱을 들 수 있겠다. 된서리는 우리나라 중부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보통 10월 말이나 11월 초 내린다. 아욱은 된서리를 맞으면 아침에는 주춤한다. 센 주먹을 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권투선수처럼 그로기 상태. 그러다 해가 올라오면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 다시 싱싱하게 살아난다.

    그럼 꽃은? 해가 웬만큼 올라와도 꽃은 꼼짝 않는다. 아욱꽃은 보통 6월과 7월에 많이 핀다. 이때는 이른 아침부터 피어 오후 늦게 진다. 하지만 추운 날엔 한낮 햇살 좋을 때 잠깐 피었다 다시 꽃잎을 닫는다. 한번은 12월 초였는데 아욱꽃이 핀 낮에 눈보라가 치는 게 아닌가. 눈보라 속 꽃이라니!



    아욱은 잘 자라면 사람 키보다 크다. 얼추 2m가량 자란다. 줄기 밑동은 웬만한 지팡이보다 굵다. 또 곁가지가 많이 뻗고, 잎도 큼지막해 데쳐서 쌈 싸 먹어도 좋다.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로 한 포기의 품이 넓다. 그럼에도 꽃은 참 작다. 콩알보다 조금 큰 정도. 잎겨드랑이마다 여러 송이 꽃이 하얗고 소박하게 핀다.

    아욱과 꽃은 모양이 독특하다. 수술 여러 개가 암술대 둘레에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단체웅예(단체수술)라 한다. 아욱꽃은 작아서 그 모습을 또렷이 보기 쉽지 않다. 같은 아욱과로 꽃이 제법 큰 무궁화, 접시꽃, 목화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럼 암술은 어디 있는가.

    아욱은 수꽃이 먼저 핀다. 그다음 암술이 수술 덩어리 한가운데를 뚫고 위로 솟아난다. 꿀샘이 발달하고 꽃가루도 좋아, 곤충이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암술머리는 여러 가닥이 파마를 한 것처럼 고불고불하다. 이 모습을 확대해 보면 꽃가루를 잘 받고자 마치 교태를 부리는 것 같다.

    아욱은 번식에서도 놀라운 적응력을 갖는다. 키가 2m 남짓 자라는 아욱은 한 포기만 해도 잎겨드랑이마다 여러 송이 꽃이 피고, 꽃 한 송이가 지고 나면 꼬투리 하나에 씨앗이 10알이나 11알 남짓 생긴다. 꼬투리 속에 뺑 돌아가며 씨앗이 촘촘해 마치 무슨 보석단추 같다.

    이 씨앗이 다 영글면 어떻게 흩어져 나갈까. 몇 해 전 집 앞 텃밭에 아욱 몇 포기를 심은 적이 있다. 그해 가을, 씨앗을 잘 받아뒀지만 뿌릴 일이 없었다. 그 이듬해 여기저기서 저절로 씨가 싹이 터 자라는 게 아닌가. 사람은 그저 먹을 양만큼 남기고 너무 많다 싶으면 풀 뽑듯 뽑아버리면 된다.

    눈보라 맞으며 생명 끝나는 날까지

    아욱꽃을 찾아온 벌. 아욱꽃과 같은 아욱과인 접시꽃. 아욱은 저희끼리 알아서 적당한 거리와 시기를 두고 싹이 난다(왼쪽부터).

    씨앗마다 자기 리듬으로

    더 경이로운 건 새싹끼리 돋아나는 거리와 시기다. 씨앗마다 적당한 거리를 갖고 싹이 트며, 그 시기도 아주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아욱 한 포기가 남기는 씨앗이 수백 또는 수천 개 되지만 이 씨앗들이 한곳에 빼곡히 몰려서 나는 건 정말이지 ‘어쩌다’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도 딱 한 번 봤다. 나머지는 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드문드문 한 포기씩 자란다.

    싹 트는 시기도 그렇다. 이른 봄 싹이 트는 씨앗도 있지만, 여름에 싹이 돋기도 하며 심지어 가을에 싹이 돋기도 한다. 탁월한 종족 보존 능력이다. 한겨울 빼고는 그 존재감이 늘 빛난다. 그럼 어떻게 아욱은 저희끼리 알아서 멀리까지 씨앗을 퍼뜨릴까. 내가 추측한 바로는 큰 키와 바람이다. 2m 이상 되는 큰 키에 잎이 넓으니 센 바람이 불면 아욱은 줄기 탄성이 높아진다. 이 탄성을 이용해 씨앗을 아주 멀리 보내게 된다.

    조금 극적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Y자형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묶어 새총을 만든 다음, 줄을 팽팽히 당겼다 놓으면 작은 돌멩이를 아주 멀리 보낼 수 있지 않나. 멀리 보낼수록 씨앗은 고루 흩어진다.

    아, 겨울이 깊어지기 전 된서리 이겨낸 아욱된장국을 한번 먹어야겠다.

    눈보라 맞으며 생명 끝나는 날까지

    2m 넘게 자라는 아욱.

    아욱 : 쌍떡잎식물 갈래꽃 아욱과 한해살이풀. 중국 원산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잘 자란다. 줄기는 곧게 서며, 원뿔 모양. 1년에 여러 차례 심을 수 있는데 심는 시기에 따라 꽃은 6월부터 11월까지 볼 수 있다. 꽃잎은 5장이며 끝이 연보랏빛으로 물드는 흰색이다. 수술 10개가 한 덩어리(단체웅예)를 이루며 서로 뒤엉켜 있다. 암술이 그 가운데를 뚫고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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