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3

2015.11.16

‘신흥’이 사라진 자리

신흥국 성장세 부진에 ‘네덜란드병’ 우려마저 한국도 내수확대정책 펼쳐야

  • 이지선 정성태 신민영

    입력2015-11-16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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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이 사라진 자리
    잔치가 끝난 것일까. 신흥국 경제 전반에 대한 우려가 증폭하고 있다. 향후 세계 경제성장을 이끌어나갈 기대주에서 골칫덩어리로 전락할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단기적인 경기 둔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구조적 측면에서의 경기 부진 요인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럽 재정위기로 선진국 경제가 휘청거리는 동안에도 세계 경제를 지켜왔던 신흥국 경제의 성장세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률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그래프 참조). 그러더니 2000년대(2000~2009) 들어 양측 간 성장률 격차가 4.3%p까지 벌어졌다. 개혁·개방과 선진국 기업들의 글로벌화 등에 힘입어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이 이어지고, 원자재가격이 대폭 오르면서 브라질 같은 자원수출국 경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에는 신흥국 성장세가 부진해졌다. 격차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자원이 제조업 발목 잡는 아이러니

    신흥국 저성장의 배경에는 먼저, 수요 측면에서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이던 선진국과 중국의 부진이 있다. 선진국 소비 수요를 떠받쳤던 부채 증가 속도가 2008년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더욱이 구조적으로도 선진국은 인구고령화와 노동생산성 하락이 이어지면서 성장률이 크게 높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비스 소비 비중이 늘어나면서 선진국의 성장이 신흥국의 수출 증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도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선진국 경제성장률과 신흥국의 대(對)선진국 수출 사이 상관계수는 2006~2010년 0.68에서 2011~2015년 1분기 0.26으로 감소한 바 있다.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끌던 중국은 연 7% 성장도 버거운 상황이다. 더욱이 중국 당국이 추진하는 소비 중심 성장으로의 구조 변화는 신흥국의 수출에 부정적일 개연성이 높다. 세계투입산출표(World Input-Output Table)를 분석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중국 고정자산투자가 교역상대국의 부가가치(국내총생산·GDP)를 늘리는 효과는 소비의 평균 2.1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중국의 투자증가율이 낮은 수준에 오랫동안 머무를 경우 신흥국이 입을 타격은 지금보다 클 것이다. 한국, 일본 등 고성장 시기를 겪은 국가는 대부분 투자율이 30%를 넘어서다 성장률 하락과 동시에 급격히 하락한 뒤 낮은 수준에 머무는 패턴을 보여왔다. 중국 역시 이러한 전철을 밟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공급 측면도 간단치 않다. 그간 신흥국의 투자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던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의 확산이 주춤하고 있다. 전 세계 수출 가운데 부분품 비중이 줄어드는 데다 신흥국에 대한 직접투자 증가율도 한 자릿수에 그치고 있다. 신흥국 자체 투자율도 2011년 이후 크게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중간재 수입으로 신흥국 성장에 도움을 주던 중국에서 부분품의 자급률이 높아지고 있는 점도 글로벌 생산 유발 효과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성장률에 비해 저조한 무역증가율이 장기간 진행될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나 설비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으므로 신흥국에는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흥’이 사라진 자리
    대니 로드릭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후발 신흥국들의 조기탈산업화(premature deindustrialization)를 경고한다. 신흥국 경제에서 제조업 비중이 더는 늘어나지 않는 현상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생산성 향상이 빠르므로, 대부분 국가는 제조업을 육성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는 패턴을 보였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분업구조가 약화하면서 후발 신흥국이 제조업을 통해 성장을 도모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신흥국에서 저성장이 고착화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로드릭 교수의 경고는 극단적 사례지만 최근 들어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률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일부나마 그 설득력을 무시하기 어렵다.

    중국의 투자 둔화와 전 세계적인 자원절약형 성장 패턴은 자원수출국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운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부 국가는 ‘네덜란드병’에 걸렸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네덜란드병이란 자원 수출로 일시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던 국가에서 물가와 통화가치 상승으로 제조업이 쇠퇴해 경기 침체를 겪는 현상을 말한다. 한때 러시아는 제지와 기계 부문에서, 브라질은 항공 부문에서 제조업 발전의 싹이 보였으나 이제는 성장 기회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흥국 비중 23%, 한국의 딜레마

    이러한 변화는 신흥국에게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신흥국 경제의 고성장은 외부환경이 개선된 데 힘입은 바 컸다. 내부적 문제는 세계 경제 호황이나 중국의 고속성장 같은 좋은 흐름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당시의 호의적 환경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신흥국 각 나라는 자기 실력으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과제 앞에 홀로 서 있는 셈이다. 상당수 국가에서 저성장 국면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인적자본과 제도적 수준이 우수하고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는 외부 요인이 불리하더라도 자체적인 성장동력을 찾아내는 차별화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말레이시아, 태국, 터키 같은 나라는 인적자본이나 제도적 수준, 기업 활동 용이성 측면에서 우위에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성장세를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베네수엘라나 나이지리아 같은 국가에서는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신흥국 경제의 구조적 부진이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신흥국에 대한 수출로 우리 경제가 얻는 부가가치는 GDP의 23%에 이른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흥국 경기 부진은 한국 경제에 두 가지 과제를 던져준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내수 성장을 통해 수출 주도 성장의 한계를 극복해나가야 할 불가피한 시점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선전해온 수출에 주력하면서도, 연금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동시에 규제 완화를 통해 잠재수요가 있는 서비스의 공급 애로를 제거하는 등 내수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기업들의 대응 방식 역시 변해야 한다. 신흥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는 흐름을 인정한다 해도 분명 긍정적인 이면은 있다. 중국 같은 일부 거대 국가의 경우 도시화가 더욱 진전되고 내수확대정책으로 소비시장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신흥국의 차별화를 고려해가며 수출과 시장 공략 전략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지선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jiseonlee@lgeri.com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st@lgeri.com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myshin@lge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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